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⑬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⑬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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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군 선발대 참전 국제전(國際戰)으로 비화

세자 광해군의 분조(分朝)를 뒤에 남기고 15일 영변을 떠난 선조일행은 이날 박천(博川)에 도착했으며 밤 11시가 넘어 다시 길을 떠났다. 꼬박 날을 새워 다음날 16일 가산(嘉山)을 거쳐 정주(定州)에 도착, 17일 하루를 쉬고 18일 곽산(郭山)으로 향했으며 20일 용천(龍川)에 도착했다.

 이날 평양에 남아있다가 뒤아 온 좌의정 윤두수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匹夫)의 경솔한 행동이’라는 극언을 하며 명나라 망명을 말렸다. 선조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채 오히려 윤두수에 애원하는 눈치였다.

 선조는 이미 정주에서 대사헌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 수사로 명나라에 보내면서 그편에 망명의 뜻을 밝힌 자문(咨文:중국과 오가는 문서)을 보냈었다.

 ’궁빈(宮嬪)를 이끌고 상국(上國:明)에 내부(內附:망명)코자 원합니다’

 명나라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한 나라의 왕이 망명해 온다는 사실은 외교적으로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쟁에 패하여 도망해 오는 것이었다. 받아들였다가 구실을 주어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고 명나라 영토가 전쟁텨가 될수도 있는 일이었다. 명으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었다.

 명나라 신종(神宗)황제가 칙령(勅令)을 내렸다.

 ’국왕이 도피하다니 측은하도다. 원병을 보낼테니 그 사이 힘껏 나라를 지킬 것이로되 앉아서 망하는 일이 없도록 할지어다’ 달래고 나무랐다.

 ’칙지(勅旨)를 받아 조선에 통첩을 보낸 부총병(副總兵) 양소훈(楊紹勳은 한술 더 떠 선조를 꾸짖었다.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피하여 온다면 군민(軍民)이 싸울 마음이 없어질 것이요. 강을 건너올 생각을 마시오"

 굴욕적인 망명외교가 아닐 수 없었다.

 명나라는 선조가 기어이 망명해 오겠다면 인원을 백명으로 제한하고 관막보(寬寞堡)의 빈집에 수용키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비로소 당장의 망명을 단념하고 의주(義州)로 갔다. 22일 이었다.

 그에 앞서 선조는 19일 곽산에서 1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온 명나라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을 만났다. 요동에 건너간 이덕형이 순무학걸(巡撫학杰)에 6차에 걸쳐 글을 올리고 그의 마당에 엎드려 하루를 울었다. 학걸이 마침내 그의 휘하 5천명 군사를 임시로 파견키로 하고 선발대 1천명이 먼저 출발한 것이다. 사은사 신점(申點)이 북경에서 명조정 방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학걸의 임시출병을 추인케 했다.

 이로써 명나라가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 참전케 됐고, 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명나라의 참전에 대해 당시 조선 조정은 조선 구원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야가 오직 감사해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나면 틀림없이 명나라를 침공해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러가지로 대책을 논의한 결과 어차피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한만큼 미리 조선에 출병, 조선영토에서 싸움으로써 전화(戰火)가 명나라 국토에 미치지 않게하는 것이 국가이익을 위해 옳다는 냉정한 결론을 내리고 출병을 결정했었다.

 조선의 조정은 이 때 이미 국내의 전황이 조선에 유리하게 전환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채 명에 굴욕적인 망명과 구원외교를 벌이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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