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①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①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8.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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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문물 수용으로 국력신장

 

임진왜란때 사용된 조총

 1592년 朝·日전쟁이 터질 무렵의 조선의 조정은 기이할 만큼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정부였다.

 그 첫번째의 의문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던 정부였길래 이웃나라의 동향에 대해 그렇게까지도 모르고 지날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먼 나라가 아니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아침에 배를 타면 저녁에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는 거리에 있는 나라였다. 더구나 일본은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高麗이래 수시로 왜구(倭寇)들이 몰려와 변방을 노략질해 가는 해적국가였고 일종의 가상 적국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조정은 朝·日전쟁이 터지기 5년전, 1587년(宣祖 20년) 9월에 대마도의 도주(島主) 송의조(宋義調)가 교강광(橋康廣)이라는 사신을 보내 알려올 때까지 일본이 백여년에 걸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보냈다는 사실도, 풍신수길(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마침내 60여 州를 무력으로 병합하여 일본을 통일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백여년 동안 일본 천지를 뒤흔든 이같은 일본내의 전란을 몰랐을뿐 아니라 이해 풍신수길이 장차 조선과 明을 침공하기 위해 조선과 가장 가까운 九州(쿠우슈)에 20만 대군을 집결시킨 사실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이해 5월, 풍신수길은 그때까지 굴복지 않고 있던 구주정벌을 위해 본토로부터 20만 대군을 출병시켜 수륙(水陸) 양면으로 침공했다. 그런데 구주정별에 이같은 대군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대군에 놀란 구주의 영주 도진(島津·시마즈)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해 버렸다. 수길은 곧바로 조선으로 침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 일종의 기동훈련을 겸했던 것이다.

 조선의 조정은 그로부터 5년뒤 전쟁이 터지던 날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1천여 척의 대규모 상륙선단(船團)이 그날 저녘 부산앞 바다를 까맣게 뒤덮을 때까지도 일본의 조선 침공을 몰랐을 뿐 아니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뒤 3일이 지난뒤에야 비로소 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았다.

 조선의 조정이 모른것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그무렵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서의 변혁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말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첫 물결이 일본 열도에까지 밀려들면서 일본은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서세동점의 선두주자격인 포르투갈인들이 1510년 인도 고아에 이어 1516년 중국 서남단의 마카오에 식민기지를 건설하고 1543년에는 일본 구주의 종자도(種子島)에 나타나 조총(鳥銃)과 탄약 및 그 제조법을 전했다.

 조총이란 하늘을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서 해양세력들의 세계사적 만남이라 하겠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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