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⑭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⑭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0.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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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수군 남해서 연승, 전쟁주도권 朝鮮으로

6월로 접어든뒤 이순신 함대의 전라도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일본군의 남·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풍신수길의 수륙병진전략을 근본부터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고 전라도 의병들이 대규모로 봉기, 소조 천융경의 제6번대 침공군의 전라도 진격을 웅치(熊峙)에서 잇따라 격퇴, 곡창 호남을 보전하는데 성공한다. 경상도와 충청도 의병이 영천(永川)과 청주(淸州)를 수복하는등 점차 전쟁의 주도권이 조선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대신들 가운데 오직 좌의정 윤두수만이 선조의 망명을 만류하고 자력으로 싸울것과 명나라 군사가 와도 그 횡포가 클것을 우려, 반대했을 뿐 선조이하 모두가 명의 구원군에 매달렸다.

 조선은 이로인해 뒷날 망해가는 명나라와 신흥 淸나라 사이에 끼어 줄타기 2중외교와 친명외교를 펴다가 청군의 두차례에 걸친 침공을 자초하는 화근을 남겼다.

 전라도 군사들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4월말쯤 대규모로 움직였었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도내 군사 8천명을 이끌고 왕을 향해 충청도 공주(公州)까지 북상했다 그러나 왕이 이미 파천을 떠났고 한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전주로 퇴군했다. 전라도 백성들은 이광이 싸우지도 않고 군사를 되돌려온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태인(泰仁)출신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은 이광에 "임금이 북천을 하셨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싸우지 않고 피해 왔을뿐 아니라 다시 싸우러 나가지 않다니 무슨 연고시오"라며 칼을 빼들고 눈을 부릅뜨며 대들었다. 이광이 겁먹고 사죄한뒤 다시 싸우러 가기로 했다.

 이광은 도내 각 군현에 동원령을 내려 4만명의 대군을 전주에 집결시켰다. 5월20일 군사를 각각 2만명씩 둘로 나누어 우종대(右縱隊)는 방어사 곽영(郭嶸)의 지휘아래 선봉장에 조방장 백광언, 중위장(中衛長)에 광주목사 권율(權慄)로 하여 전주~여산~공주~온양으로 향하게 했고, 좌종대는 이광 자신의 지휘아래 선봉장에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중위장에 나주(羅州)목사 이경복(李慶福)으로 하여 전주~용안~임천~온양으로 향하게 했다.

 이때 선조는 평양에서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 순찰사 김수로 하여금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온양에서 전라도 군사와 합류, 이른바 하삼도(下三道)군사로 하여금 일본군을 치도록 했다.

 윤선각은 충청병사 신익(申翌) 방어사 유천(兪沃) 조방장 이세호(李世灝)와 함께 충청도 군사 8천명을, 김수는 경상도 군사 1백여명을 거느리고 온양에 나타났다.

 이광 휘하에는 고부(古阜)군수 이광인(李光仁) 함열(咸悅)현감 정연(鄭淵) 등이 참전했다. 

 온양에서 잠시 머문후 6월4일 충청도 군사는 수원으로 직행했고 전라도 군사는 용인을 거쳐 북상, 한성의 적을 치기로 하고 출진했다.

 전라도 군사는 군사도 많거니와 물자가 풍부하여 무기 식량 군막 피복 등을 실은 수레 등이 많아 50여리에 뻗쳐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실제 군사들은 갑작스레 모은 병사들로 그 무렵 조선군들이 모두 그렇거니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은일이 없는 오합지졸들이었고 더구나 지휘하는 이광 윤선각 김수를 비롯 각 군현의 수령들 태반이 문관들로 진군하는 모습이 양떼들 같았다. 불안해진 무관 백광언이 10여개 부대로 나누어 한 두 부대가 패전해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자고 건의 했으나 이광이 묵살하고 선봉과 중위(中衛)로만 구분, 대부대로 행군케 했다.

 용인성 남쪽 10리쯤 북두문산(北斗門山)에서 적의 작은 진지(소성:와키사카 야수하루)휘하의 수군 1천600명중 600명이었는데 주력 1천명이 한성에 있다가 급보를 받고 달려와 점심때쯤 용인에 도착, 일시에 달려 들었다.

 소규모 적병만 보다가 갑자기 대규모 적병이 나타나자 이광군 선봉대가 걷잡을 수 없이 흩어졌다. 백광언과 이지시가 진두지휘를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혼전중에 전사했고 이광인 정연 등도 죽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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