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1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18)
  • 김재춘
  • 승인 2019.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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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 끝 이순신 전라수수 발탁, 전쟁승패 갈라

이순신의 남서해 제해권 장악은 최후의 승리를 조선에 안겨준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뒤 일본의 정변(政變)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일본이 역사를 달리하게 된다.

 나고야에 묶여 있었던 10만 예비대 가운데는 강호(江戶:에도)의 영주 덕천가강(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출병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덕천가강은 군사력을 보존할수가 있었고 수길이 죽은뒤 그에 충성하는 소서행장과 석진삼성 등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 일본을 장악, 덕천막부(德川幕府 도꾸가와 바쿠후)를 건설할수 있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발탁이야말로 조선의 국운이었으며 조선왕조의 행운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1년전, 선조 24년2월, 조정은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井邑)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全羅左道 水軍 節度使:전라좌수사)로 기용했다.

 종6품 현감을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수사로 발령하는 일은 파격중의 파격이었다. 요즘 같으면 정읍군수를 일약 전남지구 해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격이었다.

 곡절도 많았고 사연도 겹쳤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이 된것은 1589년12월. 그로부터 7개월이 된 1590년 7월 갑작스럽게 고사리(高沙里) 첨사(僉使)로 발령이 났다. 첨사는 종3품이었다. 관리들의 인사이동이 원칙대로 잘됐는지 안됐는지를 따지는 것을 임무로 하는 조정의 대간(臺諫)들이 부당하다고 들고 일어나 탄핵하는 바람에 취소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헌법격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당하(堂下)수령은 30개월, 당상수령은 20개월, 변방수령은 12개월 내에 인사이동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8월에 다시 만포(滿浦)첨사로 발령되었다. 대간들이 또다시 들고 일어나 취소되었다.

 해가 바뀌어 1591년2월, 태인(泰仁)현감까지 겸해 일심히 일하고 있는데 진도(珍島)현령(종5품)으로 발령되었다. 부임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가리포(加里浦)첨사로 바뀌어 발령장이 왔다. 진도에서 데리러 온 관원들을 보내고 가리포 관원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새로운 발령장이 날아 들었다.

 전라좌수사였다.

 대간들의 탄핵도 없었다.

 그가 부임하고 만 1년만에 조·일전쟁이 터진다. 이순신은 그 무렵 세계 최강의 전라도수군을 이끌고 남해일대의 제해권을 장악, 멸망직전까지 몰린 조선을 구하는 그 개인에는 영웅의 길이고 국가에는 구국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가 전라좌수사로 발탁되기까지의 조정의 움직임이 어떤것이 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불세출(不世出)의 장재(將才)임을 알아본 유성룡 등의 줄기찬 기용 노력의 결실일 수 있다.

 반년동안 다섯차례나 인사발령이 뒤바뀐 끝에 마침내 그가 전라좌수사가 된것은 어쩌면 조선의 국운이 다하지 않았던 때문이었으며 영웅탄생 전야의 진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서둘러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있는 여수(麗水)로 달려갔다.

 수전의 명장 이순신은 이렇게해서 역사무대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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