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⑫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⑫
  • 김재춘
  • 승인 2019.10.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조 明나라 망명(亡命)을 결심하다

  강북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응인과 신할이 일본군의 퇴각으로 판단, 강을 건너 추적을 주장했다. 역전의 노장 유극량이 적의 꾀임수일 수 있다며 말렸으나 듣지 않았고 김명원은 말을 못했다.

 강을 건너 추이 시작됐으나 곧바로 일본군의 역습에 걸려 도강한 군사 태반이 전멸했다. 유극량과 신할, 독진관(督陣官)으로 따라간 홍봉상(洪鳳祥) 등이 전사했다.

 강북쪽에 남아 싸움을 지켜보던 김명원과 항응인이 27일 평양에 돌아왔으나 조정은 패전책임을 묻지 않았다. 대탄에 진을 치고 있던 이양원은 강원도로 가버렸다.

 임진강 전투에 패하자 선조는 사실상 국가수호를 포기하고 명나라로 명망할 마음까지 품었다. 끊임없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명을 청하는 한편 조정을 둘로 나누어(分朝) 세자에 국가회복을 맡겨놓고 자신은 의주(義州)로 가 있다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몸을 피할 생각이었다.

 6월6일 우의정 유홍동이 왕비를 시위하고 함흥으로 꺼났다. 이날 군사 12명을 보내 일본군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살폈더니 이미 황주에까지 와 있었다.

 8일 일본군이 대동강변에 나타났다.

 선조가 마음이 급해져 있는 판에 명나라 요동순안어사(遼東巡按御使)가 보낸 진장(鎭將) 임세록(林世綠)이 왔다. 전쟁이 터지자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뒤이어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와 구원병을 청했는데 이들이 말하는 일본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라 명나라 조정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이를 확인시키기 위해 보낸것이었다. 임세록이 일본군을 확인하고 떠났다.

 10일 선조일행이 평양을 떠나려 했으나 백성들이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가로막는 바람에 중지했다. 홍여순이 얻어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11일 길을 막는 백성 셋의 목을 벤 끝에 선조일행이 겨우 출발했다. 말을 탄 선조의 옷(大布)이 진흙투성이었다.

 평안성에는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 평안감사 송언신 등을 남겨 지키게 했다.

 선조일행은 12일 안주성(安州城)을 지나 13일 영변(寧邊)에 도착했다.

 여기서 선조는 마침내 명나라 망명의 뜻을 밝히고 함경도로 향하여 덕천(德川)에 가 있는 왕비를 되돌아오게 하는 한편 세자 광해군에 조정대신들을 나누어 주어 나라를 재건하도록 분조(分朝)의 결단을 내렸다.

 선조는 15일 세자일행을 남겨두고 묘사주(廟社主: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하직하고 떠나면서 통곡했다.

 "나는 살아서 이미 망국의 임금이 되었으며, 죽어서 장차 이역의 혼이되려고 하나니 부자가 서로 헤어져 다시 만나볼 기약이 없도다. 바라노니 세자는 나를 다시 일으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임금도 울고 세자도 울고 대신들도 목을 놓아 울았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0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