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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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8.2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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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공앞서 일본은 여러차례 경고했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조선건국 이래 200여년간 일본은 60여 차례나 사신을 보내 조선을 뻔질나게 드나든데 반해 조선은 6차례 사신을 보낸데 그쳤으며 1443년(세종 25년)이후 150여년간에는 단 한차례의 사신도 보낸일이 없었다.

 나라 전체가 일본에 대해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조정의 이같은 정보부재로 1592년(임진壬辰:선조宣祖 25년)에는 일본으로 부터 1627년(정묘丁卯:인조仁祖 5년)과 1636년(병자丙子:인조 14년)에는 여전(淸)으로부터 호되게 다쳤던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 장님이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조선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했다.

 60여차례의 사신 파견을 통해 조선조정의 동향과 국방의 허실을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수시로 변방을 침범한 왜구들을 통해 조선군의 전투력 수준까지 알고 있었다.

 부산포 왜관에는 조선을 잘아는 일본 상인들이 언제나 드나들었고 전쟁이 임박해지자 조선말을 아는 일본인들을 조선인으로 변장시킨 밀정(橫目 요꼬메) 수십명을 조선에 밀입국시켜 상세한 조선지도를 만들었는가 하면 조선 전역의 쌀 소출량까지 조사시켰다. 조선인을 납치해다가 일본인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통역가도 양성했다.

 침공에 앞서 일본은 조선의 조정에 여러차례 경고를 보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공을 결심하자 일본내 평화주의자 소서행장 등이 대마도의 영주들과 은밀히 협의, 이 사실을 조선에 알려줌으로써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손을 써 전쟁을 사전에 막아보고자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대마도는 조선과 특별한 관계로 만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 대마도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어있어 평화노력에 적극 가담했다.

 사신을 보내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일본의 조선 침공을 알렸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끝내는 들으려고도 않고 외면해 버렸다.

 귤강광이 조선의 조정에 전한 풍신수길의 국서에는 “이제 천하가 짐(秀吉)의 한줌 손안에 들어왔다”는 등 외교의례에서 벗어난 내용이 들어 있었고, 귤강광이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라는 등의 언동을 거침없이 해 댐으로써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여주었다.

 1588년(선조 21년) 12월 소서행장은 새로 대마도 도주가 된 송의지(宋義智)와 중 현소(玄蘇)등을 사신으로 보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소서행장 등은 풍신수길이 조선의 항복을 원하고 있으나 조선이 이에 응할리 없기 때문에 통신사의 파견을 조선의 항복으로 수길을 적당히 속여 전쟁을 막아볼 속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년) 6월 이들이 다시 조선에 와 다음해 3월까지 머무르면서 통신사 파견을 거듭 요청했다. 조선의 조정은 이에대해 1555년(명종明宗 10년) 을묘왜변(乙卯倭變)때 전라도 흥양(興陽) 땅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했던 왜구의 두목들과 이들을 안내했던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의 송환을 요구했고 이들이 이에 응하자 가까스로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했다. 이때에도 이들은 여러 경로로 조선이 손을 쓰지 않으면 일본이 침공한다고 알렸다.

 1590년(선조 23년) 3월, 첨지중추부사 황윤길(黃允吉)을 상사(上使), 사성(司成)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전적(典籍) 許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는 조선 통신사 일행 100여명이 일본측 사신들과 함께 한성(漢城)을 출발, 7월에 일본 동도(東都 교토)에 도착했고 11월에 수길을 접견하여 선조의 국서를 전달한뒤 수길의 국서를 받아 조선의 부산포에 돌아온게 1591년(선조 24년) 1월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1년전이었다.

 이들은 돌아와 선조에 역사상 길이 유명한 엇갈린 보고를 했다.

 서인(西人)인 상사 황윤길은 “수길은 눈빛이 빛나니 틀림없이 쳐들어 온다”고 했고, 동인(東人)인 부사 김성일은 “수길의 눈이 쥐와 같으니 쳐들어 오지 못한다”고 했다.

 관상(觀相)쟁이 사신들이었던 셈이다.

 

 ▲참고문헌:임진전란사(이형석), 한국사통론(변태섭), 대세계사(현암사), 징비록(유성룡), 한국근대사(강만길), 임진왜란(김성한), 일본의 역사(정상청), 국사대사전(교육대전), 택리지(이중환)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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