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⑮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⑮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0.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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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전 영웅 권율 등장 전라감사겸 순찰사로

이광이 주력을 광교산(光敎山)에 물려 선발대 패전병을 수습하고 수원으로 향했던 충청도 군사가 돌아와 합류, 진을 쳤다. 6일 아침 전군이 풀어놓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군 돌격대가 들이 닥쳤다.

 충청병사 신익이 재빨리 도망치고 이광도 흰옷으로 갈아입고 내빼자 대군이 산더미 무너지듯 했다. 무기와 식량 등 모든 군수물자를 그대로 쌓아 두고 조선군끼리 밟고 넘어지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권율만이 군사를 온전히 이끌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10리를 쫓다가 물러나 조선군이 달아나며 버린 군수물자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광은 전주로, 윤선각은 공주로, 권율은 광주로, 이경복은 나주로, 김수는 경상도로 뿔뿔이 사라졌다.

 조정은 패전 책임을 물어 이광과 신익은 백의종군(白衣從軍), 윤선각은 파직케 했고, 권율을 전라감사겸 순찰사로 임명했다. 뒷날 육전의 영웅 권율이 역사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무능한 지휘관에 이글린 전라도 군사 4만명인 이렇게 하여 일본군 1천600명에 의해 궤멸되는 패전으로 서전을 장식하게 되었다.

 한ㅍ녀 조정이 떠나고 난 평양에는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과 명군의 안내책임을 맡은 유성룡이 남아 있었다. 평안감사 송언신이 대동문 성루를, 평안병사 이윤덕이 부벽루(浮碧樓) 위쪽 강변을, 자산(慈山)군수 윤유후(尹裕後)가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군사가 3-4천명 있었고, 군량이 10여만석 있었다.

 대동강변에 도착한 일본군은 소서행장과 훅전장정의 1,3번대 주력이었다. 강변 10여곳에 진을 치고 강이 깊고 넓어 도하를 못한채 대치하고 있었다.

 13일 도원수 김명원이 보기로 적의 경비가 많이 헤이해진것 같았다. 영원군수 고언백(高彦伯) 벽원첨사 유경령(柳璟令)으로 하여금 정예 400명을 거느리고 삼경(밤 12시)에 부벽루아래 능라도(陵羅島)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적을 기습하도록 했다. 용맹한 임욱경(任旭慶) 등이 앞장서 한밤에 적진을 습격, 적의 부장 삼촌지청(杉村智淸)등을 죽이고 300여 마리의 군마를 탈취, 강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적의 역습이 뒤따랐다. 다급해진 조선군이 능라도 아래 강물이 얕은 왕성탄(王城灘)을 건너 퇴각했다.

 적이 왕성탄은 깊지 않은것을 알았다. 이곳은 왕성 조방장 박석명(朴錫命) 수탄장 오응정(吳應鼎) 등이 지키고 있었다. 14일 저녁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왕성탄으로 쏟아져 건너왔다. 조선군은 대항하지 못하고 모두 도망쳤다.

 윤두수는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무기들을 풍월루(風月樓)의 못속에 버린다음 순안으로 빠져 나가고 도원수 김명원 등 모든 장수도 성을 빠져나가 버렸다.

 15일 소서행장 종의지 흑전장정 등이 텅빈 조선의 제2의 수도 평양에 아무 저항없이 입성했다.

 

 <註>  이글이 연재되는 가운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비판의 서신과 전화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침공군을 ’일본군’이라 기술하고 있는데 대해 ’왜군’ ’왜병’’왜적’ 등으로 기술하는게 옳지 않겠느냐는 서울 거주 독자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이에대해 필자는 왜국 왜인 왜병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의 속칭이고 일본 일본인 일본군이 정식 명칭으로 보아 ’일본군’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침공군은 ’일본국’의 정부군인 ’일본군’이었습니다.

 한반도 변방을 자주 노략질하던 ’무장 일본인’들은 도적떼들인만큼 ’왜구’라 하는게 적절하겠습니다.

 1590년 선조 23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이 휴대한 조선왕조의 국서에 ’조선국왕 이연이 글을 일본국왕 전하에게 바치노니’라 했고, 이에 대한 풍신수길의 답서에도 ’일본국 관백 수길이 글을 조선국왕 각하에 바치노니’라 하여 공힉적인 국명은 어디까지나 ’일본국’이라 했습니다.

 필자는 다분히 의도적인 일본 비하의 속칭 대신 공식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이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재 조명을 시도코자 ’왜병’ 대신 ’일본군’으로 기술하고 있으니 이해있으시기 바랍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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