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1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17)
  • 김재춘
  • 승인 2019.10.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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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水陸)전략 깨져 평양(平壤)주둔 日육군 진격못해

분조는 장동(長洞)으로 가 다음날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계를 이루는 낭림(浪林)산맥을 넘어 함경도 개마고원으로 들어서려 했는데 철령의 이혼군사가 패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오던 길로 되돌아 섰다. 개마고원은 백두산(白頭山:2,744m) 남서쪽 일대 4만㎢에 걸쳐 해발 1천m에서 2천m 높이로 펼쳐진 한반도 최고최대의 용암(溶岩)고원으로 온통 원시림이 덮인 산악지대였다.

 6월22일 吉영변에 도착했고 26일 맹산(猛山), 29일 초산(楚山), 7월1일 양덕(陽德), 5일에는 가등청정의 2번대 진격로를 가로질러 곡산(谷山)을 뚫고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들어가 머물렀다.

분조가 이천에 머물자 각지에 흩어졌던 조정 신하들이 모여 들었다. 호조판서 한준(韓準), 병조참판 정윤복(丁胤福), 이조참의 洪혼 등이었다.

 분조는 7월28일 이천을 떠나 곡산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8월4일 성천(成川)으로 옮겼다.

 분조는 가등청정 2번대의 함경도와 소서행장 1번대의 평안도 사이 낭림산맥의 산악지대를 타고남하와 북상을 계속하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백성들을 위로했으나 전쟁지도는 선조의 본조(本朝)에서 했기 때분에 별다른 역할은 없었다.

 한편 평양을 점령한 1번대 소서행장은 더이상 진격을 하지 않은채 꼼짝않고 있었다. 순안(順安)과 영변(寧邊) 등이 지척에 있는데도 공격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평양 북쪽 평안도 백성들의 민심이 안정되어 나갔고 피난 조정도 정신을 가다듬어 점차 전쟁지도에 활기를 되찾았으며 질서도 회복해 나갔다. 유성룡은 안주, 순찰사 이원익은 순안, 도원수 김명원은 숙천(肅川)에 머물러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했다. 명나라 원군(援軍)을 맞을 준비도 해나갔다. 진격로 주요지점에 미리 군량과 마초, 말먹이 콩과 밀도 옮겨다 쌓아 놓았고 청천강(淸川江)에는 부교(浮橋:뜬다리)를 만들어 두어 명나라 군사들이 건널수 있게했다.

 정주(定州) 가산(嘉山)의 군량미가 2천석을 넘었고 때마침 충청도 아산창(牙山倉)의 세미(稅米) 1,200석이 뱃길로 옮겨와 정주와 가산에 각 200석씩 추가하고 안주에 800석을 쌓아두기도 했다.

 조선에는 군사를 재편성, 명군과 연합하여 반격에 나설수 있는 행운의 기회였고 천금같은 시간이었다.

 패주하는 적군에 군대를 재편성, 반격할 수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은 공격군에게는 작전상 큰 실수가 아닐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소서행장은 평양에서 일보도 더 전진하지 않았다. 소년시절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소서행장이 이같은 기초적인 전쟁원리를 모를리가 없었다.

 본래 평화주의자였고 이 전쟁의 무모함을 알고 있었던 그가 더이상이 진격으로 명을 자극, 전쟁이 확대되는 것보다 강화교섭을 통한 전쟁의 조기 종식을 바랐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가 남해와 서해를 돌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되어있는 일본으로부터의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풍신수길의 조선침공의 기본전략은 수륙병진책이었고 이미 조선에 투입된 9번대까지의 15만8,700명을 제외한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11만8,300명은 구슈 나고야의 발진기지에 예비대로 대기, 언제든지 출동할수 있게 되어 있었다.

 평양의 소서행장이 중현소를 시켜 의주의 선조에 글을 보내왔다.

 "일본수군 10여만명이 지금 서쪽바다로 오는 중이요. 그렇게 되면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징비록)

 순순히 항복하라는 협박편지였다. 그러나 그가 기다리고 있던 일본 수군 10만명은 영원히 오지 못했다.

 이미 남해 수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전라도 수군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됐고, 남서해의 제해권은 조선 수군이 장악아래 들어가 있었다. 일본의 조선침공군 예비대 10만명은 나고야 발진기지에 그대로 묶여버리고 말았다.

 조선이 누린 행운의 기회는 하늘이 준것도, 우연도 아닌 이순신함대 전승의 결과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 ’우리 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남해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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