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⑩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⑩
  • 김재춘
  • 승인 201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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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백성들 경복궁(景福宮), 형조(刑曹), 대신(大臣)집에 불질러

  조선왕조 2백년의 수도 한성이 日本침공군에 의해 전쟁 발발 스무날만에 무혈점령 되었다는 사실은 오욕의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오욕은 한 나라의 수도를 이렇다 할 저항없이 침공군에 내주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치욕의 역사에서 조선왕조는 아무런 반성이나 교훈을 얻지 못한채 국방부재의 문약(文弱) 국가체제를 그대로 지속, 1910년 일본군의 3백년만의 재침때 수도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무혈점령케 한 역사에까지 미친다.

 한성이 무혈점령되기 전, 조선왕조에는 보다 욕된 또하나의 역사가 기록된다.

 30일 이른 새벽 선조가 왕비 일행과 조정대신 등 1백여명을 거느리고 통곡하는 백성들과 비구름이 무겁게 덮힌 한성을 뒤로하며 돈의문을 나선뒤 얼마되지 않아 성중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성난 백성들이 궁궐로 몰려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차례로 불을 질렀으며 평소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장례원(掌隷院)과 형조 그리고 왕자 임해군과 前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에 모두 불을 질렀다. 일본 침공군들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의 방화로 유서깊은 이들 궁궐이 잿더미가 되었을 뿐아니라 홍문관의 서적과 춘추관의 왕조실록, 사초(史草)와 승정원일기 등이 모두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장예원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문서도 이때 불타 버렸다. 민심을 잃은 정부가 겪을수 밖에 없는 수난의 역사였다.

 선조의 의주(義州) 파천행렬은 왕의 절대궈위가 땅에 떨어진 참담한 도피행렬이었다.

 벽제역(碧蹄驛)을 지나고 혜음령(惠陰嶺)을 지날때는 폭우가 쏟아졌다. 일행중 시종들은 물론 대신들까지도 슬금슬금 눈치보아 가며 행렬에서 빠져 도망을 갔다. 저녁에 되어 임진강변에 도착했다. 배가 오륙척 있었으나 어둡고 서로 타려고 다투어 위, 아래가 없었다. 강변의 옛 승청(丞廳)건물에 불을 질러 앞을 밝히며 강을 건넜다. 밤 10시가 되어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하니 파주(坡州)목사 허진(許晉)과 장단(長湍)부사 구효연(具孝淵)이 음식을 가져왔는데 하루를 굶은 일행이 다투어 먹어버려 세자이하 대신들 몫이 없었다. 허진과 구효연이 행여 죄가 될까 보아 달아나 버렸다.

 5월1일. 개성을 향해 출발 하려보니 이졸(吏卒)들까지 모두 도망가 버려 왕을 호위할 사람조차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서흥(瑞興)부사 南의가 군사 수백명과 말 50~60마리를 끌고왔다. 南의가 군사들 식량용으로 갖고 다니는 쌀과 좁쌀을 얻어 밥을 지어먹고 길을 떠났다.

 저녁 늦게 개성에 도착했다.

 백성들 가운데 일행을 향해 선조의 잘못을 큰소리로 외치기도 했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누구 한사람 나무라지도 못했다.

 2일 아침. 피난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이지경이 된 사태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었다. 나라를 잘못 이끈 죄로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를 파직했다. 그 바람에 좌의정 유성룡이 영의정, 우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좌의정, 하루전 어영(御營)대장이 된 윤두수(尹斗壽)가 우의정이 되었다. 윤두수는 지난해 10월 대사헌으로 있다가 정철의 일당으로 몰려 연안(延安)으로 귀양 갔다가 귀양이 풀려 고향에 가 있었는데 선조가 한성을 떠나면서 그는 개성으로 달려갔다.

 정철은 정여립 사건때 좌의정으로 조사관이 되어 사건 연루자들이라 해서 동인들을 혹독하게 숙청, 조정을 서인지배로 했다. 사건이 고비를 넘길 무렵 이산해, 유성용 등과 의논이 되어 선조에 세자책봉을 말했다가 미움을 사 강계(江界)에 귀양을 갔었다. 이산해, 유성룡은 쏙빠져 버렸다. 조정은 다시 동인지배가 되었다.

 선조는 한성 출발에 앞서 29일에야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둘째왕자 광해군(光海君) 혼을 세자로 삼았다.

 이날 저녁에 개성 백성들 가운데 정철을 다시 불러 쓰라는 상소가 있자 선조는 그를 석방, 돌아오게 하고 유성룡로 나라일을 그르친 책임이 있다는 탄핵이 있자 영의정을 파직, 좌의정 최흥원을 영의정, 우의정 윤두수를 좌의정, 기성부원군 유홍(兪泓)을 우의정에 발령했다. 바로 조령막개(朝令幕改)였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2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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