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프롤로그 ③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프롤로그 ③
  • 김재춘
  • 승인 2019.08.1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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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豊臣秀吉)

국가간 전쟁은 한 국가가 상대 국가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자국의 전쟁목적을 강제로 성취하려는데서 야기된다.

이해 풍신수길의 일본은 선조왕(宣祖王)의 조선에 대해 ‘대륙진출의 길(征明假道)을 비키라’고 요구했고,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의 전쟁목적은 ‘정명가도’를 강제로 트는 것이었고 조선의 전쟁목적은 이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7년 전쟁 끝에 일본은 전쟁 목적의 성취에 실패했고, 조선은 끝내 성취에 성공했다.

조선이 승전국임은 그뒤 더욱 분명해진다. 패전국은 국가가 망하거나 정변을 겪기 마련이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정권의 세습에 실패했고, 정적(政敵)인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정권을 빼앗겼으나 조선의 이씨 왕조(李氏 王朝)는 그로부터 3백년간 끄떡없이 정권을 지탱해 나갔다.

그런데도 조선은 어떤 사연으로 침략자들을 격퇴시킨 자신의 승리에 환호하기는 커녕 승전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었고,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영원히 후손에 전해 국가의 영광, 민족의 자존과 긍지의 원천으로 삼게하지 못했던 것일까.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유서깊은 모스크바까지 불타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어도 이 전쟁에서 거둔 최후의 승리에 대해 영원한 러시아의 영광 슬라브민족의 긍지로 후손들에 길이 전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로, 차이코프스키는 ‘1812년 서곡’으로 문학과 음악으로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조선왕조는 국가관 및 전쟁관의 결핍에 있었던 것 같다. 국민국가가 아닌 동양의 왕조 국가였던 만큼 국가 즉 왕이었고 국권 즉 왕권이었다. 따라서 모든 전쟁행위를 신성불가침의 왕권에 도전하는 난동행위(亂動行爲)로만 파악했던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일본 즉 왜국(倭國)의 대군이 침공 했는데도 ‘임진년의 왜란(壬辰年 倭亂)’신흥 청국(淸國)의 대군이 침공하여 王이 성밖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했는데도 ‘병자년의 호란(丙子年 胡亂)’으로만 파악했다. 이에는 倭國이든 淸國이든 하나의 실존하는 국가로 인식하기 보다 불법무도한 무장집단 쯤으로만 보는 유교(儒敎) 특유의 공리공론(空理空論)적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朝鮮王朝는 이들 전쟁을 국가간 흥망을 건 군사적 쟁탈전(爭奪戰)으로 보지 못하고 무장집단들의 무례한 난동행위로 인식했으며 따라서 승패(勝敗)의 개념보다 평안(平安)의 개념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종전후 ‘적을 격퇴했다’는 승리의 환호는 없고, 난리(亂離)가 가라 앉았다는 안도만이 있었으며 난동으로 입은 아픈 상처와 고통만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근대적인 학문체계로의 韓國史는 일제(日帝) 총독부 관료 사학자들에 의해 편찬됐다.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해 각색되고 왜곡 될 수밖에 없었다. 1592년의 朝·日전쟁에서 조선이 패전한 것처럼 체계화시킨 것은 그들의 솜씨였다.

두번째의 문제는 이 전쟁에서 전라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사실상 조선의 승리를 주도했는데도 이같은 사실이 거의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라도는 전쟁 직전 조작된 이른바 졍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반역향(反逆鄕)이라 낙인혀 그뒤 관료진출이 막혔고, 전쟁 후에는 피폐한 조정의 세수(稅收)의 60%를 전라도에 집중시킴으로써 오늘날 전라도 피폐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 전쟁에서의 전라도의 역할은 이순신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남긴 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蕪瑚南 是無國家)’ ‘만일 전라도가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다’ 그대로 였다.

전라도는 상승(常勝) 조선수군의 기지(여수(麗水))였으며, 무적 이순신 함대의 주력은 전라도 수병들이었다.

이 전쟁의 3대첩(大捷)이었던 한산도(閑山島)대첩은 물론 행주(幸州)대첩도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휘하의 6천 전라도 의병들이 거둔 승리였고, 1차 김시민(金時敏)장군의 진주(晋州)대첩에 이은 2차 진주성전투는 김천일(金千鎰)장군 휘화 전라도 의병들의 혈투였으며, 장수(長水) 주논개(朱論介)의 충절을 남겼다.

임진년 파죽의 세(破竹之勢)로 북진하던 일군이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이치(梨峙)와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全州)로 진격하다가 각각 격파됨으로써 전라도는 이 전쟁기간중 수군기지, 의병기지, 군량기지가 되어 조선의 최후의 승리를 주도했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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