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비유환 ⑤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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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수단 미비로 전쟁반발 3일후에야 조정 알아

  울산에 본영을 둔 경상도 우병영의 육군사령관인 좌병사는 이각(李珏)이었다. 일본군 침공 소식을 듣고 군수 이언함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을 나와 14일 동래성에 들어갔다. 부산진이 떨어지고 동래성이 위협 받게 되자 싸우자는 송상현을 뿌리치고 이언함을 남겨 둔체 성밖에서 지원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다. 거기서 밀양부사 박진을 만났다. 박진 군사 5백여명을 1선에 배치하고 자기는 2선에 있다가 적이 나타나 박진군과 싸움이 붙자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박진군만 일격을 얻어맞고 밀양으로 후퇴했다.

 언양(彦陽)에서 역시 좌수영을 버리고 도망온 좌수사 박홍을 만난 이각은울산으로 되돌아가 우선 가족들을 피신기켰다. 울산병영에는 안동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과 13개 읍의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윤판관이 싸우자 했으나 이각은 그대로 내빼고 말았다.

 이각은 뒷날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에 붙잡혀 청형된다. 울산에 모여있던 군사들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경상도 일대가 장작더미 무너지듯 걷잡을수 없이 붕괴도고 있던 사흘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조정에 ㅂㄱ홍의 장계가 도착한게 17일 아침이었다.

 선조가 늦잠을 자고있어 기다렸다가 보고했다.

 조정이 당황했고, 크게 어수선해졌다. 그런데 김성일의 장계가 뒤따라 도착했다.

 "그러면 그렇지"

 안도했다. 뒤이어 경상감사 金수의 장계가 도착했다. 다시 크게 술렁그렸다. 그때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김수는 진주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동래로 달려가다가 동래가 떨어지자 되돌아가 조정에 장계를 띄우고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 백성들을 피난시키도록 했다. 김수는 그뒤 밀양(密陽)-영산(靈山)-초계(草溪)-거창(居昌)으로 도주행각을 벌였다.

 그무렵 조선의 긴급통신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횃불신호. 전국의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대(烽燧臺)를 쌓아 놓고 5개 연결망으로 연결했으며 군사가 고정배치되어 있다가 변방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횃불 즉 봉화(烽火)를 올려 조정에 알리는 방법이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이었다. 경상도쪽에는 제2거로 동래 다대포 뒷산이 시점이고 도중 양산, 언양을 거치고 단양, 충주등을 거쳐 종점 황주와 남산까지 20개의 봉수대가 있었으며 40명의 인원(伍將)이 고정배치돼 있었다. 일본군이 부산앞바다에 나타난 14일 저녁 다대포에서 봉화를 올려 제대로 연결되었으면 아무리 늦었어도 15일중으로 조정에 보고가 되었어야 했다. 이 연락망이 어떻게 되어 작동이 안됐는지 어떤 기록도 전하고 있지 않다.

 다음이 역체(驛遞)제도. 전국 주요 도로변 5백38개 지점에 驛을 두고 역마(驛馬)를 두어 장계등 공무서나 관물(官物)을 날랐다. 경상도에만 1백50개 驛에 역마 9백필, 이졸(吏卒) 2만1천483명이 있었다. 역마를 파발마, 이졸을 파발꾼이라 불렀다.

 박홍의 장계가 이 파발꾼에 의해 사를만에 조정에 전달된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으나 선조나 조정 대신드의 머리에서 대책이 나올게 없었다.

 적정(敵情)도 제대로 모르고 순사지식도 없었으며 국방체계도 뒤죽박죽이었다. 할수있는 일이라곤 사람을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는 인사발령뿐이었다.

 이일(李謚)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 현지에 급파키로 했다. 순변사란 변방을 순시하는 벼슬인데 편리한대로 벼슬을 주어 실전에 투입한 것이다.

 이일은 6년전 북방 여진족 나탕개가 쳐들어 왔을때 이를 물리친 이름있는 장수였다.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성응길(成應吉), 右방어사로 조경(趙儆), 죽령조방장(竹嶺助防將)으로 유극양(劉克良), 조령(鳥嶺)조방장으로 변기(邊璣)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변응성(邊應星)을 함께 발령했다.

 장수들은 임명했는데 군사가 없었다.

 병조(兵曹)에서 급히 끌어모은게 백도(白徒건달) 서이(胥吏아전) 유생(유생)들 뿐이었다. 그마저 숫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하는수 없이 군사는 뒤따라 보내기로 하고 20일 이일 등 군관 60여명이 먼저 떠났다.

 세계전사상 유례가 없는 희한한 출진이었다. 싸우는 졸병은 없고 지휘하는 장군과 장교들만의 출병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2월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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