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⑨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⑨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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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의 히스테리 왕권(王權)노이로제가 사건 확대 불러왔다
졍여립이 자살한 죽도

’혐의’내용도 ’거사계획’도 조금만 생각을 갖고 새겨보면 한바탕 웃음거리 같은 맹랑한 것들이었다 실패하면 삼족(三族:부모처계父母妻系)을 멸하는 역모를 꾸미면서 황당무계한 소문부터 냈다거나 서당을 차리고 계를 만들어 드러내놓고 무리를 모으고 무술을 훈련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상식밖의 짓이다.

 한 나라 왕조(王朝)를 뒤엎으려 했다는 역모사건에 직접 가담자로 처형된 사람은 자살했다는 여립과 변숭복외에 황해도 거럴뱅이 백성 2명과 소년 2명뿐이었다. 길삼봉도, 지함두도, 중 3명도 그 뒤 그들을 추적했다든가, 체포되어 어떻게 했다든가의 일체의 기록이 없다. 무기나 군량미가 적발됐다든가 군사책임자나 군사들이 붙잡혔다든가도 일제 기록이 없다.

 피바람은 엉뚱한데서 회오리 쳤다.

 처음 사건이 터졌을때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위관(委官:조사관)이었다. 그는 동인이었다. 그는 여립과 9촌간잉네다가 여립을 두둔했다해서 체포되었고 아들 율(慄)은 자살했다. 갑산(甲山)에 유배되어 죽고 말았다.

 서인의 거두 정철(鄭澈)이 우의정이 되고 위관이 되었다. 澈은 전라도 창평(昌平:현 담양군 창평면) 사람이었다. 피의 숙청이 벌어졌다.

 대사헌 이발이 여립과 절친했다 해서 종성(鍾城)에 유배됐다 다시 불려와 아우 현감 파(波), 응교길 등 3형제가 장살됐고 82세 노모 처 유아 사위 절과 명룡(命龍) 그리고 노비들까지 모조리 압슬형(壓膝刑:묶어놓고 무거운 돌로 눌러 죽이는 형벌)으로 죽어갔다.

 부제학 백유양(白惟讓)이 사촌 백유성(白惟成)의 상소로 며느리가 여립의 형 여흥(汝興)의 딸이라해서 아들 수민(壽民)·진민(振民)·흥민(興民)과 함께 장살됐다.

 전주 여립의 삼족이 멸문의 참극을 빚었고, 조상 무덤들이 파헤쳐졌는데도 새로 전주부윤이 되어온 윤우신(尹又新)이 여립과 친교가 있었다는 사람들을 모조리 뒤져 잡아다 고문하는 바람에 조사 받다가 죽은 사람만 70여명에 이르렀다.

 전 곡성현감 정개청(鄭介淸)은 여립의 묘자리를 보아주었다고 해서, 사헌부장녕(司憲府掌令) 유몽정(柳夢井), 찰방(察訪) 이황종, 참봉 윤기립(尹起笠), 전 선산 부사(善山 府使) 유덕수(柳德粹), 낙원교생(樂院校生) 선홍복(宣弘福)은 여립과 친하다 해서, 전 사축(司畜) 최영경(崔永慶), 동생 신녕(新寧)현감 최여경(崔餘慶)은 난데없이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서,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은 여립이 죽은날 울었다 해서 붙잡혀 들어가 장상됐다.

 어이없는 역모 광란극에 1천여명의 희생자가 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통곡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조정에서는 파격적인 논공(論功)이 행해졌다.

 이축(李軸) 박충간(朴忠侃)은 종사품(從四品) 군수(郡守)에서 각각 4계급 특진, 이축은 공조참판(工曹參判), 박충간은 형조참판(刑曹參判) 등 종2품(從二品)으로, 한응인(韓應寅)은 3계급 특진 호조참판(戶曹參判) 정삼품(正三品)으로, 여립을 잡은 鎭安(진안)현감 종육품(從六品) 민인백(閔仁佰)은 5계급 특진, 예조참의(禮曹參議) 정삼품이 됐다. 음모사실을 밀고했다는 조구(趙球) 이수 강응기(姜應祺) 등도 당상관 정이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벼슬이 내려졌다.

  이른바 정여립 역모사건은 문약에 빠졌을뿐 국가경영의 제왕학을 터득치 못했고, 여성적 히스테리 성격자였던 선조의 ’역모노이로제’에 東西로 나뉜 조정관료들의 정권쟁탈전이 구조적으로 뒤얽혀 빚어낸 참극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이 황해도서 터진것은 당대 유학의 대가로 율곡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西人 송익필(宋翼弼)이 천민출신임이 드러나 황해도 백용(白用)으로 도망가 있다가 東人 공격과 신분회복을 위해 조작했다는 주장(최근무(崔根茂)교수)과 西人의 조작(김용덕(金龍德)교수)이라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어떻든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이 일어난 함경도에 이어 이 사건으로 반역향(鄕)의 낙인이 찍혀 인재들의 관계진출이 막힌 전라도가 이 비극적인 사건과 관계없이 뒤이어 터진 朝日전쟁에서 구국의 전선에 뛰어든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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