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⑧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개전전야 ⑧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09.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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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모(逆謀)혐의, 거사(擧事)계획, 가담자 하나같이 허구(虛構) 일색
죽도의 절경

 20일 선조가 선정전(宣政殿)앞뜰에서 옥남과 춘룡을 직접 심문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두 소년은 마침내 역모를 꾸몄다고 자백했고, 옥남은 주모자가 길삼봉(吉三峯)이라고 진술했다. 길삼봉은 天安 어느 양반집 노비였는데 주인을 속이고 산에 들어가 도적이 됐으며 용맹하여 포졸들이 겁을 먹고 있었던 인물로 30여년전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던 의적 임꺽정(林巨正)과 같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역모에 가담자라 해서 황대도 거렁뱅이 두명은 요참형(腰斬刑: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에, 두 소년은 책형(기둥에 묶어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고 여립의 시체는 능악처참(凌渥處斬), 사지를 찢어 조정 신하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구경케 했다. 조카 이진길은 혹독한 고문에도 역모가담을 끝까지 부인하다 장살(杖殺:매맞아 죽음)됐다.

 27일 선조는 역모를 사전에 적발 역적들을 다스렸다고 고묘(告廟:나라나 왕실에 큰 일이 있을때 종묘(宗廟)에 여쭈는 일) 의식을 가진뒤 령고(領敎) 즉 백성들에 널리 알렸다. 조정 신하들로부터 권정례(權停禮:임금이 참석않는 조례(朝禮))로 축하를 받았고 사형이하의 잡범들에 특사를 내렸다.

 기록이 전하는 사건의 줄거리다.

 기록이 전하고 있는 여립의 됨됨이와 역모 혐의 그리고 들통이 나게된 경위는 이렇다.

 여립은 동래 鄭씨로 全州 남문밖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현감 벼슬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이다. 1571년(선조 4년) 문과에 급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출중해 당대의 명현 栗谷 이이와 성운(成運)의 총애를 받았고, 예조좌랑(禮曺佐郞)을 거쳐 수찬(修撰) 즉 임금에 경서(經書)를 강독하는 벼슬에 올랐다. 그가 수찬이 되기 전해에 스승 율곡이 죽었다. 율곡은 西人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東人쪽에서 그의 생존때 허물을 들추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잘못된 일은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려졌다. 율곡의 제자 여립도 서인으로 분류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당파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東人의 거두 대사헌 이발(李潑)과도 친했다. 이발은 광주인(光州人)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적과 동지를 분명히 하는 당쟁에서 회색적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1585년(선조 18년) 4월29일 경연(經筵: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경서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선조가 여립에 "율곡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동인 지배의 조정 분위기 탓이어서인지 그의 소신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여립은 율곡에 비판적인 견해를 말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선조가 몹시 불쾌해 했고 열세에 있던 서인들과 율곡의 제자들이 들고 일어나 논란이 격화됐다. 여립은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전주와 금구 태인에 서당을 내 젊은 이들을 가르쳤고,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매달 15일 한차례씩 만나 활쏘기 등으로 교우를 넓히며 지냈다.

 그에 관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고지식하고 편협한 유생(儒生)관료이기 보다 활달하고 개혁적이며 합리적 사고를 가졌던 것 같다. 극도의 문약(文弱)에 빠진 유생관료들이 선비의 육예(六藝) 즉 예藝 낙樂 샤射 어御 서書 수數 육학(六學)중 무(武)에 속하는 사와 어를 천시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활쏘기와 말달리기로 심신을 단련했다.

임금의 절대권위에도 비판적이었고 사람들의 귀천(貴賤)도 따지지 않았다 한다. 명분주의보다 현실주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전라도적(全羅道的) 인물(人物)’이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의 이같은 언행이 절대 왕권하의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유생관료들러부터는 위험시되고 백성들로부터는 추앙을 받게 되었을 법하다.

 기록이 전하는 ’혐의’라는 것을 보면 허황하다.

 ▲서당을 내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대동계를 조직, 활쏘기 등을 한게 역모를 위해 무리를 만들고 무술을 단련시킨 것이다.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금구 부잣집으로 장가들었다.

 ▲아들의 등에 王자가 있어 玉男이라 했고 옥남의 한눈에 눈동자가 둘이었다.

 ▲뽕나무에 말(馬)갈기가 나는집 주인이 왕이 된다는 동요를 만들어 퍼뜨린뒤 자기집 뽕나무에 말갈기를 심었다가 마을사람들에 보이고 없앴다.

 ▲승(僧) 의연(義衍)을 시켜 ’전주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소문을 내게했고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 즉 李씨가 망하고, 鄭씨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綠) 비결의 예언을 玉판에 새겨 지리산에 숨겼다가 중 도잠과 설청(雪淸)을 시켜 찾아내게 해 소문을 내게 했다.

 ▲지함두라는 사람을 시켜 ’길삼봉(吉三峯)과 정팔용(鄭八龍)이 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한다. 정팔용이는 정여립이다’는 소문을 내게 했다.

 이같은 소문을 낸뒤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진격,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李씨 왕조를 뒤 엎는다는 ’거사계획’을 짰다.

 그런데 황해도 안악군수 이축 등에 여립과 한 패거리 변숭복의 조카 조구(趙球)와 대동계원 이수가 밀고를 해와 들통이 났다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허구나 조작으로 볼 수밖에 없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1월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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