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2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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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長水 침공기도는 경상도 義兵이 격퇴

풍신수길의 점령계획에서 전라도를 맡은 고바야까와 다까가게(소조천경小旱川隆景) 제6번 대장은 본국에서 30만 석의 영주로 그는 침공 당시 60세 노장이었으며 풍신수길과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역전의 용사였다.

 그는 노장이어서인지 그의 6번대 실전 지휘는 ㅏㄴ고꾸지 에께에이(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이란 승장(僧將)이 주로 맡았다. 혜경은 일본 광도(廣島)현의 안예(安藝)지방에 있는 안국사(安國寺)라는 절의 주지였는데 6번대 부장(部長)으로 참전, 스스로 ’전라감사(全羅監司)’라 칭했다.

 제6번대 1만5,700명의 병력은 부산에 상륙한 뒤 주력은 경상도 성주(星州), 선산(善山), 금산(金山·금천金泉)일대에 배치, 점령지역 확대와 한성과 부산 사이의 보급선 경계임무를 맡게 하는 한편 별군(別軍)을 나누어 창원(昌原)에 주둔케 한 뒤 안국사 혜경이 지휘하여 남원-전주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제6번대의 남원 진공은 물론 육십령(六十嶺)을 넘는 전라도 침공은 경상도 일대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들의 유격전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된다.

 6월 무렵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면 정인홍(鄭仁弘) 등 역사에 그 이름을 기리 빛내고 있는 경상도 의병장들이 각각 거점을 확보하고 수백 수천명씩의 의병군을 거느리고 활발하게 유격전을 전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보급선을 교란하는 한편 점차 적이 주둔하고 있는 성을 공격 탈환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곽재우는 의녕(宜寧)에 거점을 확보하고 낙동강(洛東江) 南江일대에서 김면은 거창에 주둔하면서 金山일대에서 그리고 정인홍은 성주에 있으면서 고령과 합천(陜川)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제6번대는 팔양치(八良峙)와 여원치(女院峙)로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창원의 별군을 출동시켰다가 의령 땅 정암진(鼎巖津) 길목을 지키고 있던 곽재우 의병군에 격퇴되었다. 금산 주둔군을 동원, 지례(知禮)-거창-안의를 지나 육십령으로 소백산맥 넘어 장수 장계로 하여 진안-전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 역시 지례-거창 사이의 우척현(牛脊峴)을 지키고 있던 김면 의병군에 저지되었다.

 6번대는 결국 이미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는 추풍령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 영동을 돌아 무주-금산으로 쳐들어갔다.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는 6번대가 경상도에 배치 되어있는 동안 한성에 올라가 있다가 전라도 침공작전이 시작되면서 현지로 내려와 작전을 지휘했다.

 일본군 침공때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성을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금산을 점령, 전진기지를 확보한 6번대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일대는 자칭 전라감사 안국사 혜경이 지휘하여 용담(龍潭)을 치고 진안을 친 다음 웅치로 향했고, 다른 일대는 고바야까와 다까가게가 직접 지휘하여 진산을 친 다음 이치(梨峙)로 향했다.

 고바야까와 다까가게는 주공을 진안-웅치로 하고 진산-이치를 조공(助攻)으로 하여 전라도 감영이 있는 全州城을 동쪽과 북쪽에서 협격하려 했던 것 같다.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웅치에 나타난 일본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에 이른 왜적이 1만명’이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6번대 전 병력이 동원되어 무주-금산-용담-진안 등 점령지역 경비와 이치전투가 일부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주력을 熊峙전에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의 무주-錦山 침입은 전라도 전역을 긴장 시켰다. 전라도는 용인(龍仁) 패전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전라도는 일본군 침공이 늦은 만큼 그에 대한 방비의 여유가 있었다.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를 남원 팔랑치에, 장수 이계정(李繼鄭)을 육십령에 비채 경상도에서 넘어오는 적에 대비했다. 그러나 적이 무주에 나타나자 이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南原부사 윤안성(尹安性)과 판관 노종령(盧從齡)이 적이 장수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가 尹부사는 돌아와 그 사이 관고(官庫)를 턴 백성 몇 사람을 잡아 목을 치고 盧판관은 감사 이광에 붙잡혀 볼기를 맞고 남원으로 쫓겨 갔다.

 그런가 하면 이광의 작전 미숙으로 용인에서 대패 후 광주로 내려와 있던 목사 권율은 또다른 전투에 대비, 군사 1,500명을 맹훈련, 정병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적이 전라도에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조정에 장계를 띄우고 全州로 왔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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