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2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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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출동 한산도·안골포해전서 일함 76척 격파

  일본 수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현지 주민 김천손(金千孫)에 의해 수집되어 이순신에 보고되었다.

 적군은 ’큰배 26척, 중간배 34척, 작은배 10척으로 모두 70척’이었다.

 견내량은 통영군 용남면과 거제군 소등면 사이 폭 300~400m, 길이 4km가량의 좁고 긴 해협이다.

 8일 조선과 일본 7년 전쟁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대해전의 날이 밝았다.

 이른아침, 조선 수군 전 함대가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해협으로 항진 해갔다. 견내량 길다란 해협으로 들어가기전 이순신이 어영담을 불렀다.

 "판옥선 5척을 이끌고 견내량 깊숙이 들어가 적선을 유인해 내라"

 주력 전투함들은 거제 한산 미륵도 등 주변섬들에 자취를 숨기도록 하고 자신이 탄 지휘선만을 호위선 수척과 함께ㅐ 한산섬 앞바다에 띄워 견내량을 살폈다.

 이순신은 견내량 해협이 좁아 아군의 포위공격이 어렵다고 판단, 넓은 바다로 유인한뒤 포위 섬멸키로 한 거시다.

 얼마후 어영담이 달려 나오고 그뒤를 일본 군함이 바다를 뒤덮으며 기세좋게 쫓아 나오고 있었다. 어영담의 군선에서 신기전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

 적의 유인에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이순신의 지휘선에서 대포가 터지고 사방에 숨어있던 조선 군함들이 모여들어 학의 날개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전투대형을 짜기 시작했다. 어영담의 군선을 쫓아오던 적선들이 날개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자 양쪽 날개가 좁혀들어 적선의 뒤를 차단하면서 바짝 조였다.

 적선들이 밀집대형으로 몰린채 꼼짝없이 포위망 안에 들고 말았다.

 이순신의 軍令이 떨어지자 조선군 전함대의 함포가 일제히 불을 토했다. 대장군선, 장군전, 차대전이 날고 각종 신기전들이 불꼬리를 달고 적함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승차총통이 한바탕 콩 볶듯이 하고나면 화살이 소나가기 처럼 퍼 부어졌다. 이기남의 거북선이 적함들속에 뛰어들어 육중한 선체를 기우뚱 거릴때마다 떠받친 적함들이 우지근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순천부사 권순, 광양현감 어영담, 흥양현감 배홍립, 방답첨사 이순신, 낙안군수 신호, 녹도만호 정운, 발포만호 황정록, 군관 윤사공, 가안책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전공을 다투듯 모두 두서너척씩의 적함을 깨뜨렸다.

 강장(强將)밑에 약졸(弱卒)은 없는 법. 그건의 여처차례 실전경험과 연전연승 용사들이 되었다.

 유군일령장 손윤문(遊軍一嶺將 孫允文)은 적의 작은 전투선 2척이 육지로 도망가 일본 병사들이 배를 버리고 뭍에 오르자 뒤쫓아가 배를 불질러 버린데 그치지 않고 뒤따라 뭍에 올라 백병전으로 적을 섬멸해 버렸다.

 좌수영 군사들의 용맹함을 따라 우수영 이억기 군사들과 경상 우수영 원균 군사들도 용감히 싸웠다.

 이날 하루종일 한산도 앞바다는 불타는 일본군함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과 연기, 깨진 일본군함 선체조각 그리고 일본 수병의 시체로 뒤덮여 지옥의 참상을 연출했다.

 이날 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투함은 단 한척의 손실없이 일본 군함 56척이 격파됐다.

 적장 마나베 사마노조은 할복자결했고 와끼사카 사요에, 와다나베 시찌우에몬이 전사했다. 적병의 전사자가 얼마인지 분명치는 않다. 다만 넓은 바다에서 격침당한 배에 타고 있던 적 수병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며 척당 30~50명을 기준해도 적어도 2천~3천여명의 적병이 한산도 앞바다에 그 원혼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수군의 희생자는 뒤이어 벌어진 안골포(安骨浦)해전 희생자까지 포함 전사 19명 부상 115명이었던 것으로 전해져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수병 한사람까지 사상자 명단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다.

 살아 도망친 적선은 큰배 1척, 중간배 7척, 작은배 6척으로 모두 14척에 불과했다. 와끼사까 야스하루는 큰배에 타고 목숨을 구해 김해성(金海城)으로 도망쳤다.

 전라도 수군의 한산도 승리는 전라도 육군의 용인패배에 대한 통쾌한 복수전이기도 했다.

 전투가 한창일때 일본군 수병 4백여명이 한산도로 헤엄쳐 도망갔다. 전투가 끝난뒤 이순신은 원균에 적병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케 했는데 일본군 대군이 몰려온다는 헛소문에 놀란 원균이 포위를 풀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이들이 밤에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도로 도망쳐 버렸다.

 이날 한산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전면적으로 장악하게 된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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