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3)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3)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29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군 6번대 1만병력으로 전라도 침공
왜군 섬멸한 진안군 웅치 고개 / 진안군 제공
왜군 섬멸한 진안군 웅치 고개 / 진안군 제공

조정은 그에게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를 명했다.

 권율은 安東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4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경성부(鏡城府) 판관, 義州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파직되어 고향에 있다가 전쟁이 터지던 해 光州목사로 기용되었고 이치(梨峙)전투에 공을 세워 全羅道순찰사가 되었으며 전라도 군사 6천명을 이끌고 수도 漢城 탈환전에 참가 행주(幸州)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도원수(都元帥)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근왕(勤王)차 여산(礪山)까지 북상했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군 7천명이 적의 전라도 침범 소식을 듣고 진로를 바꾸어 은진(恩津)을 거쳐 7월1일 연산(連山)에 도착, 진을 치고 적정을 살폈다.

 고경명은 光州사람으로 이해 그의 나이 60세였다. 대사헌(大司憲) 고맹영(高孟英)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사마(司馬) 1등에 급제하고 26세에 문과를 장원급제한 수재였으나 벼슬을 크게 떨치지 못하고 울산(蔚山) 영암(靈岩) 서산(瑞山) 한산(韓山)군수로 30여년을 전전하다가 동래(東萊)부사로 있던 중 전쟁이 터지기 직전, 정여립과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고향인 장흥(長興)에 와 있었다.

 한성이 일본군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5월29일 의병을 일으켜 6천 군사를 모으고 6월11일 담양(潭陽)을 출발하여 태인(泰仁)을 거쳐 전주에 도착, 남원 군사 1천명을 보태어 7천 의병을 이끌고 여산(礪山)까지 북상 했었다.

 그의 후임으로 동래 부사가 된 송상현(宋象賢)은 정읍 고부(古阜) 사람으로 개전 첫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만일 고경명이 파직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송상현이 아닌 고경명이 동래에서 죽었을 것이었다.

 권율은 金堤군수 정담(鄭湛), 南海현감 변응정(邊應井), 羅州판관 이복남(李福南), 의병장 黃박 등을 웅치에 배치, 진안으로부터의 적을 막도록 했다.

 정담은 초계(草溪)사람으로 선조16년 무과에 급제, 申립의 부하장수로 북방 여진족 니탕개(泥蕩介)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터지던 해 김제군수로 부임했었다. 변응정은 남원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 南海현감으로 그간의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웅치전투 이후 錦山전투에서 36세로 전사했다.

 이복남은 무과에 급제, 羅州판관으로 웅치전투에 참가했으며, 정유년(丁酉年) 2차전쟁 때 남원서 전사했다.

 이치(梨峙)는 권율이 동복(同福)현감 황진(黃進) 편장(編將 위대기(魏大奇 공시억(孔時億) 등을 거느리고 나가 珍山으로부터의 적을 직접 막기도 했다.

 황진은 長水사람으로 세종(世宗)때의 명재상 황희(黃喜)의 5대 孫으로 27세 때 무과 급제했다.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반드시 전쟁이 난다고 단언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치전투 뒤 충청 조방장(忠淸 助防將)이 되었고 다시 충청병사(忠淸兵使)가 되어 2차 진주성(晉州城)전투에 참전, 전사했다.

 권율과 정담은 7월초 각각 이치와 웅치로 나가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이들 두 고갯길로 쳐들어 왔다.

 적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했던 것이다.

 적이 오는 길목 요소에 함정(陷穽)을 파고 기마병이 올 만한 곳에는 거마채(拒馬砦:10여개의 대창이나 창을 적 방향으로 비스듬히 꽂아 달려오는 말이 찔리도록한 전구(戰具))들을 설치했으며 아군 참호(塹壕)주변에는 녹채(鹿砦:가시 방책)와 적병이 달라붙을 만흔 곳에는 겹겹이 목책(木柵)을 설치, 요새화 했다.

 권율은 뒷날 행주성(幸州城) 싸움에서도 이같은 방어 시설에 의한 사전 진지구축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소수의 방어군으로 대규모 적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행주전투에서는 화차(火車)등 최신 화기(火器)들을 대거 동원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반해 웅치와 이치전투에 관한 기록에서는 마름쇠탄(彈질려탄:4갸우ㅏ 뿔이 달린 마름쇠와 화약을 섞어 탄통에 넣은 뒤 심지에 불을 붙여 적진에 던져 터뜨리는 현대의 수류탄과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기록외에 화기사용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전투에서 수마석(水磨石:돌을 둥글게 깎은 석탄(石彈))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곧 대완구가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는 있다.

 이치와 웅치전에 투입된 방어군 병력 규모가 얼마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치전에는 권율 휘하의 직할군 1,500명 외에 황진군이 얼마였고, 웅치전에는 정담 휘하 박정영(朴廷榮)군 300명, 박석정(朴石精)군 100여명, 의병장 黃벅균 200여명으로 모두 600여명외에는 확실치기 않다. 다만 1만여명의 적군에 대항했던 것으로 미루어 1천내지 2천여명 이상의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웅치전에는 진안의 선비 김수(金粹) 김청(金精) 형제등 사천 김(泗川 金)씨 일가가 참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권율과 정담은 진지 구축을 강화하는 한편, 적군의 움직임을 계속 살폈다. 7월2일 적군이 용담을 지나고 5일에는 진안에 들어와 향교를 불태우는 등 분탕질을 쳤다.

 7일 마침내 안국사 혜경이 지휘하는 ’수천명의 적군’이 웅치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정담 방어군의 전면에 나타났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22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