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22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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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 西海진출 포기 방어전(防禦戰)으로 전략 바꿔
한산대첩 기록화

 한산도(閑山島)대첩은 조선군에는 조·일전쟁 7년 중의 3대 승리중의 하나였고 풍신수길로 하여금 수륙병진 전략을 실질적으로 포기케 하여 평양 깊숙이 쳐올라간 일본 육군을 고립무원에 빠지게함으로써 조선에 최후의 승리를 안겨준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 해로부터 200여년뒤 1905년 10월21일 유럽의 스페인 남서쪽끝의 트라팔카해에서 넬슨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함대 27척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33척을 기습, 분단 작전으로 그중 5척을 격침시키고 17척을 나포했으며 연합함대 수병 8천여명을 수장했다. 영국해군의 전사자는 1,663명이었다. 이 해전에서의 넬슨의 승리로 영국은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았다. 넬슨의 트라팔카 해전의 승리는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빛나고 있다.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의 승리와 넬슨의 승리 과연 어느쪽의 승리가 보다 빛나고 더 큰 승리였을까?

 한편 수길의 엄명을 받은 구기와 가또 등은 아끼사까가 먼저 떠나버린게 몹시 마음에 캥겼다. 서둘러 대소 전투함 40여척을 모아 거느리고 7일 부산진 포구를 떠나 8일 가덕도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날 와끼사카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무참히 깨지고 있었던 것을 이들은 알지 못했다. 9일에는 안골포로 옮겨 다시 하루를 보냈다.

 한산도 앞바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수군은 그날 밤을 견내량 입구 바다에서 보내고 9일 가덕도에 도착, 일본 수군이 안골포에 갔음을 알게 되었다. 풍량이 심하여 더이상 진공하지 못하고 이날밤을 거제의 온천도(溫川島:하청면)에서 보냈다.

 10일 새벽 이억기 수사의 우수영 함대는 가덕도 주변에 배치, 전투가 커지면 응원케 하고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가 원균의 경상도 함대를 뒤따라 오도록 하여 안골포로 항진해 들어갔다.

 안골포에는 3층 누각이 있는 큰배 1척, 2층 누각이 있는 큰배 2척을 비롯 큰배가 21척, 중간배가 15척, 작은배가 6척, 모두 42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포구가 좁고 수심이 얕아 판옥선의 활동에 제약이 많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보았으나 적선은 선창에서 꿈쩍도 않고 조총만 난사해왔다. 전세가 불리하면 육지로 돌라가 도망갈 심산이었다. 조선 수군에 겁먹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승패는 판가름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마음놓고 훈련하듯 번갈아 가며 적선을 공격했다. 대장군선 등을 쏘아 적선에 구멍을 낸 뒤 신기전을 퍼부어 불벼락을 뒤집어 씌웠다. 이억기 수사의 우수영 함대가 뒤따라 들어와 종일토록 공격을 퍼부었다.

 적선 20여척이 깨졌다.

 더두워져 함대를 물려 포구밖 넓은 바다에서 밤을 보낸뒤 11일 새벽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안골포 12곳에 적이 전사자 수백구를 화장하다 그대로 두고 밤사이 황급하게 달아나 버려 시체타는 냄세만 진동했다.

 金海포구 일대를 수색했으나 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ㄴ수군은 제3차 출동 6월8,10일 이틀간의 閑山島 安骨浦 두차례 해전에서 일본군 전투선 76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고 12일 한산도로 돌아와 13일 각기 수영으로 개선했다.

 승전보를 받은 조선의 선조는 크게 기뻐하여 이순신을 정헌대부(正憲大夫:正二品), 이억기와 원균을 각각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급시켰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원래 적드이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합세하여 서쪽으로 치려했다. 그러나 순신의 이 싸움으로 그들은 위세를 크게 꺾였고 行長이 평양을 얻었으나 형세가 외로워 더 진격치 못했다. 우리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에 전라·충청도로부터 황해·평안 각도 연안에 군량을 준비시키고 中興을 도모했던 것이다’고 평가했다.

 패전보를 받은 일본의 풍신수길은 크게 노하여 와끼사카를 꾸짖었으나 처벌하지는 않았으며 일본 수군 전략을 공격전략에서 방어전략으로 전환, 거제도를 비롯한 점령지역 포구 등에 성을 쌓게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화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본식 대포인 대통(大筒 오쓰쓰) 300문을 급히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1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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