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0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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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조헌·승군(僧軍) 영규 청주城 수복
조헌 영정 / 칠백의총관리소 제공
조헌 영정 / 칠백의총관리소 제공

영천성의 남쪽에는 절벽 밑으로 南川이 흐르고 있고 북쪽에는 마현산(馬峴山)이 성을 굽어보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골짜기로 둘러처져 있었다.

 권응수는 마현산 기슭 성 주변에 마른 풀과 나뭇잎 더미를 쌓아 火攻을 준비하는 한편 이날 밤 사이 남천가 숲속에 복병 4백명을 배치해 두었다가 다음날 25일 새벽 물을 길러 성을 나온 적병을 습격했다. 그뒤부터 적은 물을 길러 나오지 못하고 마른 밥을 지어 먹었다. 이날 경주에서 권사악(權士악)이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25일 하루종일 성 안팎에서 사격전을 교환했으며 서로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26일 권응수가 동생 권응평으로 하여금 결사대원 5백명을 이끌고 성밑으로 바싹 다가서게하자 적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야전에서 백병전을 벌였으나 희생자가 늘자 성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27일 아침 영천성에 대한 전면 공격이 감행됐다. 마현산 기슭에 산처럼 쌓아놓은 나뭇더미에 불을 지르자 때마침 강풍을 타고 연기와 불똥 재들이 성안으로 날아들어 적군의 시야를 차단했다. 연막전을 편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의병군이 광제(廣梯: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뛰어들고 뒤이어 성문을 깨고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가 백병전을 벌였다. 여기저기 건물들에 불길이 솟고 적군의 화약고에 불이 옮겨 붙어 폭발하면서 천지를 진동시켰다. 쫓기는 적군들이 급한대로 남천에 뛰어들었다가 수없이 빠져 죽었다. 피비린내가 십리에 풍겼다.

 적군의 사상자수는 전하지 않으나 의병군의 피해가 전사 83명, 부상자 238명이었고 적의 군마노획이 200마리, 총통 창검 등 노획이 9백여점이었으며 조선인 남녀 1090명을 구해냈다.

 이로써 영천성이 적침 95일 만에 수복되고 인근 신령 의흥 의성 안동 등의 적이 모두 경주로 퇴각했다.

 조정은 권응수를 통정대부 방어사(通政大夫 防禦使)로, 정대임을 예천(醴泉)군수로 각각 발령했다.

 조·일전쟁중 의병군 봉기는 전쟁초기에 한했거니와 지역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밖의 지역은 일본군 점령아래 있었어도 의병군의 봉기는 이들 두 지역에 비해서는 활발하지 못했다.

 충청도 의병장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기고 있는 조헌은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뒤 한달쯤이 되는 5월21일 청주 주변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집했으나 실패했다. 백성들 모두가 겁을 먹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조헌은 할 수 없이 그가 살던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가의 문인금절(門人金節) 金약 박충검(朴忠儉) 등과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보은(報恩)방면으로 진군하다가 차령(車嶺현 보은군 수한면)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크게 패했으며 자칫 목숨을 잃을뻔한 위기를 겪었다.

 조헌은 1544년(중종 39년)에 김포교생 응지(金浦校生 應祉)의 아들로 태어나 호를 중봉(重峯)이라 했고 예조좌랑(禮曹左郞) 통진현감(通津縣監) 등을 지냈으며 율곡 李珥에게서 성리학을 배워 충의정신이 강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 해 일본은 반드시 침공해 온다며 때마침 한양에 일본사신이 온것을 알고 흰옷에 도끼를 들고 대궐앞에 엎드려 사신들을 목베고 전쟁준비에 나서라고 말하는가 하면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조정의 잘잘못을 따졌다. 선조는 그를 길주(吉州)로 유배했다가 호남의 사인 양(士人 梁)산수의 상소로 유배를 풀었다. 그는 전라·경상의병장들과 같이 스스로 군량미를 조달할만한 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의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헌이 전 삼봉 조광윤(桑奉 趙光輪) 사인 장덕익(士人 張德益) 신난수(申蘭秀) 高경우 등의 도움으로 1천1백여명의 의병군을 편성한 것은 7월이 되어서 였다. 공주에서 기병한 최초의 의승군장 영규(義僧軍將 靈圭)의 승군 천여명이 합세했고 전쟁초기 淸州城을 버리고 도망쳤던 충청도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 5백명도 참여했다.

 조헌·영규는 청주성을 치기로 했다. 청주성은 5번대 복도정칙(福島正則) 휘하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7천군사중이 일부가 지키고 있었다.

 조헌은 문인이었으나 스스로 무예를 닦았으며 문하에는 이우(李瑀) 이봉(李逢) 김경백(金敬白) 등 문무겸전의 인물들이 많았다.

 7월 하순 이옥의 관군은 연기(燕岐)현에서, 영규의 승군은 안심사(安心寺)에서, 조헌의병군은 옥천에서 각각 청주성 근교에 집결하여 조헌의 지휘로 8월1일 청주성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성을 빙 둘러 에워싸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대형을 취하여 성내 일본군으로 하여금 병력을 분산 배치토록 하고 주공은 西門에 두어 집중 공격케 했다.

 갑옷입은 관군, 승복입은 승군, 바지저고리를 입은 의병군이 섞여 복장도 가지가지에 무기도 칼, 창과 활외에 특히 승병들은 풀베는 낫과 조선 도끼나 곤장 등으로 무장하여 각양각색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2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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