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최후승리 (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4.0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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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울돌목(鳴梁)으로 적을 유인하다
명량해전도 /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제공
명량해전도 /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제공

  그는 적진 8백리를 뚫고 달려오면서 수군 재건의 모체가 될 전선 12척의 재무장과 재편성을 완료했던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들 12척의 전선으로 일본 수군을 일격에 전멸시킬 전략과 필승의 신념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전도군수 부임길에 발견하고 1년전 순시길에 다시 확인해 두었던 명량의 천험으로 적 수군을 유인해다가 대파할 작전 구상을 이미 갖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필승의 신념에 불타고 있었는가는 16일에 조정에 보낸 그의 장계에 그대로 담겨 있다.

 하루 전 15일, 보성읍(寶城邑)에서 창고의 무기를 꺼내 말에 실어 보내고 있는데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유서(諭書)를 갖고 왔다. 엉뚱하게도 수군을 폐지하고 이순신을 육군지휘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임진년 1차전쟁 개전 전해에도 있었던 조정의 뚱딴지 짓이었다.

 12척의 전선으로 적을 이길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단호한 반대와 필승의 신념을 장계로 써 올리니 유명한 ’금신군선상유십이(今臣軍船尙有十二:小臣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다.

 그리고 그는 이과돈중(以寡燉衆)의 전의를 분명히 했다.

 "전선이 비록 적다해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이다"(전선수과 미신불사 즉적불감모의 戰船雖寡 微臣不死 卽賊적不敢侮矣)

 오만스러울만큼 자신에 넘쳐 있었다.

 이순신의 이 결연한 장계에 조정의 수군폐지론은 잠잠해져 버렸다.

 20일 회령포를 떠난 이순신은 이진(梨津:해남군 북평면)으로 옮겨 4일간 머문뒤 24일 어란포(於蘭浦)로 옮겼다.

 어란포에 머물고 있던 28일 적 수군 8척이 습격해 왔으나 이순신이 선두에서 반격하자 달아나 버렸다.

 29일 벽파진(壁波津:진도군 고군면)으로 옮겨 진을 쳤다. 9월2일 전쟁공포증에 시달리던 배설이 탈영을 했다. 그는 고향인 성주(星州)로 가 숨어있다가 2년뒤 체포되어 참형을 당했다.

 9월7일, 척후 군관으로부터 적선 55척이 어란포에 집결중이며 그중 13척이 출진준비를 마치고 있다고 보고해 왔다. 하오에 과연 13척이 습격해 왔다.

 이순신은 다시 선두에서 출격하자 적선들이 달아나 버렸다. 이날 밤 적선 20여 척이 야습을 감행해 왔으나 미리 전투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던 이순신 함대의 반격에 놀라 다시 달아나 버렸다.

 9일, 벽파진 1km거리에 있는 감보도(甘甫島)에 적 척후선 2척이 나타나 정찰을 하다가 조선 수군에 들켜 재빨리 도망쳤다.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꼼짝않고 머무르면서 각처에 척후군관을 보내 적 수군의 동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

 마침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조선 수군의 패전을 설욕하고 조선 수군의 재건함은 물론 2차전쟁에 이어 2차전쟁에서도 수륙병진으로 조선 내륙 깊숙이 침공해 들어가려는 풍신수길의 전략을 다시 한번 뿌리부터 흔들어 버린 명량(鳴梁)대해전의 날이 다가왔다.

 9월14일 어란포에 잠입해 있던 척후 군관 임준영(任俊英)이 달려와 "적선 2백여척이 어란진에 집결중"이라고 보고해 왔다.

 임준영은 또 적에 붙잡혀 있다가 탈출해 나온 김중걸(金仲傑)의 말에 의하면 "적군은 벽파진 조선수군 10여척을 밀어버린 뒤 한강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고 보고해 왔다.

 일본 수군은 珍島를 빙 돌아 서해로 나가지 않고 이순신의 작전계획대로 海南군 화원(花源)반도와 珍島사이의 좁고 긴 명량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명량해협의 길이는 약 1.5km, 폭은 평균 5백m 정도이나 양쪽 해안의 50여m정도의 바다 밑에는 암초가 있어 실제 폭은 4백 여m가 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문제의 울돌목(鳴梁項)은 화원반도와 진도쪽에서 돌출부가 해협으로 뻗어 3백m쯤으로 좁아진데다가 바다 밑 1m쯤에 암초가 형성되어 있어 썰물(간조干潮)때 바닷물이 빠지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양쪽 암초 사이의 거리는 불과 120m.

 음력 9월15일에는 오전 7시와 오후 7시쯤에 서해쪽에서 남해쪽으로, 北西流가 시작되고, 새벽 1시 무렵과 오후 1시쯤에는 반대로 남해쪽에서 서해쪽으로 南東流가 시작된다.

 울돌목을 흐르는 남동류의 조류의 속도는 새벽 4시쯤 가장 급류로 시속 17km쯤이고 해협의 남동쪽 입구의 그것은 오후 4시즘에 21km까지 급류로 흐른다.

 급류가 흐를때 울돌목에서는 바닷물이 소용돌이 치며 천지가 진동하듯 하는 굉음(轟音)이 일어난다. 그래서 울돌(鳴岩)이라 했다.

 이순신은 이 천험의 울돌목에서 결전을 계획했으면서도 작전의 핵심을 숨기기 위해 해협 입구에서 4.7km나 떨어진 벽파진에 15일간이나 진을 치고 적을 유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26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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