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1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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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사신 日軍철수 독려하며 1년 걸려 부산에 도착
부산진순절도 / 육군박물관 제공
부산진순절도 / 육군박물관 제공

 소서행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서신을 받고 군사 백여명을 거느리고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있으니 소서행장이 3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대포 3발을 쏘고 3천명이 일제히 공포를 쏘는 등 한바탕 모양을 갖춘뒤 소서행장이 무장을 풀고 나타나 회담에 임했다.

 소서행장의 요청은 김응서가 조정에 요청하여 명나라에 일본의 조공을 받아주도록 청해 달라는 것이었다. 명나라 경략 고양겸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들은 조선 조정이 이미 허욱을 주청사로 보낸 사실을 서로 모르고 이에 대해 한바탕 농쟁을 벌였으며 김응서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원수부(元帥府:권율)에 보고는 하겠다고 하여 헤어졌다. 어치피 헛일이었다.

 풍신수길의 가짜 항복문서를 갖고 북경에 들어간 납관사(納款使) 소서여안(小西如安)일행을 맞은 明 조정은 일본의 조공을 허락하고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는 대신 첫째, 즉시 철군, 둘째, 공포(貢布)는 요구하지 말것, 셋째, 조선을 영구히 침략하지 말것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소서여안의 다짐을 받은뒤 책봉사 파견을 결정했다.

 풍신수길 내외를 일본 국왕과 왕비로 책봉하고 소서행장을 비롯한 일본군 8명의 장수에 도독첨사(都督僉事), 소서여안에 도독지휘사(都督指揮使) 등의 명나라 벼슬을 내리고 國書 金印 官服 등을 하서했다.

 12월30일 明 조정은 책봉정사(冊封正使)로 이종성(李宗城), 부사(副使)로 양방형(楊方亨)을 임명하는 한편 조선 국왕에 글을 보내 부산의 일본군을 조속히 철군케 한뒤 조선 국왕이 책봉사의 도해(渡海)를 주청하면 이에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하기로 했다.

 해가 바뀌어 1595년 선조 28년 을미년(乙未年)이 되었으며 전쟁도 평화도 아닌 가운데 전쟁은 4년째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의 조기 철군을 독촉하기 위해 明조정이 파견한 유격장 진운홍(陳雲鴻) 등이 1월13일 남해안 웅천에 도착하여 소서행장과 회담을 가졌으나 명나라 책봉사가 조선에 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아 실패하고 이어 2월11일 유격장 루국안 등이 와서 다시 회담했으나 성과없이 돌아갔다.

 책봉사 일행은 1월30일에야 북경을 떠나 요양(遼陽)에 오래 머물다가 4월7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도달했으며 28일에야 한성에 들어왔다. 의주에서 책봉사 일행은 유격장 심유경과 납관사 소서여안 일행을 부산에 보내 소서행장을 타이르게 하고 먼저 출발시켰는데 심유경은 한성에서 조선측의 황신(黃愼)을 데리고 4월19일 전라도 남원을 거쳐 부산으로 향하여 소서행장 진영에 도착했다.

 심유경과 소서행장은 상의끝에 행장이 일본에 건너가 수길에게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있음을 보고하고 철군명령을 받아오기로 하고 30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행장의 보고를 받은 수길은 자신이 제시한 조선 4도 분할 등 7개 조건의 수락사절이 오는줄 알고 크게 기뻐하며 조선의 일본군 장수들에 제1차 부산·동래의 모리수원(毛利秀元) 길천광가(吉川廣家) 등3개 진영, 제2차 서생포·기장 등 3개 진영, 제3차 나머지 전진영의 순으로 축차적인 ’귀휴(歸休)’를 명령했다. 수길이 철군이라 하지 않고 귀휴 즉 돌아와 쉬라는 것은 강화협상이 잘 안되면 언제든지 다시 출정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던듯 하다. 소서행장이 5월26일 부산에 돌아왔다.

 연합군측은 철군사항을 살피고 일본군측은 명나라 사신이 실제로 도착했는가를 정탐하는 가운데 한성에 머물고 있던 책봉사 일행은 7월11일 부사 양방형이 이조판서 이항복(李恒福)과 함깨 먼저 출발, 남원을 거쳐 24일 거창에 도착하여 두달간 머무르다가 10월10일 부산데 도착하여 철군이 지지부진하다고 꾸짖자 소서행장이 1·차 철군이 끝났고 3차 철군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는 가등청정이 철군하지 않고 있었다.

 한성에 남은 책봉사 정사 이종성은 소서여안 등의 안내를 받으며 9월4일 한성을 떠나 15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10월16일에 다시 떠나 함양 거창을 지나 밀양에 머물다가 11월22일에야 부산에 도착했다. 책봉사로 임명된지 1년 가까이 됐다.

 명나라 조정은 풍신수길이 항복하고 조공을 받아줌과 함께 왕으로 책봉해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위엄을 갖춰 책봉사를 파견하고 있고, 일본의 풍신수길은 자신이 제시한바 조선 4도의 분할과 명나라 황녀의 일본 출가 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가운데 일을 꾸민 심유경과 소서행장이 숨가쁘게 움직였다.

 다시 해가 바뀌어 1596년 선조 29년 병신년(丙申年)이 되었고 여전히 전쟁도 평화도 아닌 가운데 전쟁은 5년째로 접어들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5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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