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0)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0)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04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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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吉 가짜 칙서에 일부 철수
日軍과 明軍 주력 대부분 철군 소수 병력만 남아
동래부순절도 / 육군박물관 제공
동래부순절도 / 육군박물관 제공

  그무렵 일본군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일본내 비둘기파로 개전초부터 강화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며 明나라에서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명조정에는 강화에 반대흔 의견이 월등히 높았다.

 특히 선조는 복수심에 불타 유성룡에 화의를 말하는 자는 목을 베어 효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詩를 지어 그의 심회를 말하기도 했다.

 일사오녕인(一死吾寧忍) 한번 죽는것은 내 참을수 있을지라도

 구화원불문(求和願不聞) 화의를 구하는 것은 듣기도 싫다

 여하창사설(如何倡邪說) 그런데도 어찌하여 화의를 구한다는 못된 이야기를 퍼뜨려

 패의혹삼군(敗義惑三軍) 대의를 해치고 삼군을 현혹케 하는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조정내 반대분위기를 고려하여 첫째, 풍신수길의 항표(降表)와 일본군의 대마도 철군을 조건으로 하는 허봉(許封)을 신종(神宗)황제로부터 승락을 얻어내고 이를 송응창에, 송흥창은 심유경에 지시했다. 심유경은 지휘(指揮) 담종인(譚宗仁)을 11월3일 조선의 남해안 웅천(熊川)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에 보낸 그 뜻을 전하자 소서행장이 심유경을 오도록 하여 웅천에서 12월21일 서로만나 머리를 짜게되었다.

 명나라 가짜 사신을 신종황제의 칙사(勅使)로 안 풍신수길은 강화 성립을 믿었음인지 조선의 두 왕자 석방을 명령한뒤 8월초 일본군 일부의 본국 귀환을 명령했다.

 본토 귀환명령을 받은 뒤 서생포(西生浦)의 가등청정군과 임낭포(林浪浦)의 모리길성군이 경주(慶州)주둔 연합군을 공격했다. 안전 철군을 위한 견제 출동이었다.

 경주에는 明軍 부총병 왕필적(王必迪)이 尙州에서 이동해 와 있었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군 일부가 봉계(鳳溪:善山)에서, 참장 낙상지(駱尙志)군 이부가 남원에서 각각 응원출동을 와있었으며 조선군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永川군수겸 조방장 홍계남(洪季男)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6일 일본군 수천명이 경주성을 공격했다. 연합군이 성을 나와 야전에서 맞붙었다. 일본군은 1선에 조총수(鳥銃手), 2선에 궁사수(弓謝手), 3선에 장창수(長槍手), 4선에 도검수(刀劒手)의 순서로 질서있게 공격했으며 초전에 연합군 피해가 200명이 넘었다.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질때 명군 부총병 오유충의 3천명이 돌진, 일본군 진영을 두쪽으로 가르면서 전세가 역전, 일본이 패주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이 추격에 나섰다.

 미처 수습못한 전사자 시체를 길에 버린채 日軍이 서생포로 도주했으나 연합군측 피해도 전사 500여명이 넘어 멀리 추격하지는 못했다.

 제4차 경주전(慶州戰)이었다.

 이날 모리휘원(毛利輝元)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천야장길(淺野長吉)軍과 故 우시수승(羽柴秀勝)의 잔류 병력 전원이 철수를 개시하여 모두 본국으로 귀환했다.

 남해안 일대에는 일본군 약 6만여명이 잔류했다.

 부산에서 일본군 일부 병력이 철수를 하고 있던 8일 漢城쪽 후방에 주둔하고 있던 明군 3만명의 철수가 시작됐다. 부총병 양원(楊元) 이여백(李如柏) 장세작(張世爵) 사대수(査大受)와 참장 이여매(李如梅), 유격장 전세정(錢世禎) 등이 철군을 지휘했으며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10일 한성을 떠났다.

 조선에 남은 명군은 9월23일 도독(都督)으로 승진한 劉정이 지휘했으며 유정과 부총병 왕필적이 1만명을 거느리고 칠곡(漆谷)의 가산성八려에, 유격장 송대문, 곡축(谷逐)이 삼가(三嘉)현에, 부총병 오유충이 대구촌(大邱村)에,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경주에 각각 2천명씩의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하여 총병력은 1만6천명이었다.

 한편, 조선수군의 이순신(李舜臣)은 7월말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겼으며 8월30일 전라·경상·충청 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어 사실상의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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