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3)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3)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3.1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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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爭도 平和도 아닌 대치(對峙)속 서로 속이는 회담 계속

 9월중에 일본군도 동래성(東萊城) 주둔 길천광가(吉川廣家) 5천명이 본국으로 귀환하여 조선 잔류 중 병력은 3만8천명이 되었다.

 9월초, 선조가 전라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윤두수(尹斗壽), 도원수 권율(權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등에 비밀리에 교지(敎旨를 내려 ’장수들이 싸우지 않고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 있다’고 책망했다.

 강화회담 중의 明군 때문에 비밀리에 지시하는 입장이었다.

 그 무렵 일본 수군의 큰 배들은 포구 깊숙이 숨겨놓고 작은 배들로 들락거리며 조선 수군이 공격하면 육지로 도망가 토굴속에 숨어버리고 전혀 응전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큰 배를 숨겨놓은 곳은 너무 좁거나 험해 조선 수군의 판옥선 등이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간다 해도 육상의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아군의 위험이 너무 높았다.

 수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조선의 육군이 적을 바다로 몰아내 주어야 하는데 2차 당항포(唐項浦) 해전때 순변사 李빈에 수륙 협공을 통보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선조의 비밀 교지를 받은뒤 도체찰사 윤두수가 南原에서 順天으로 와 충청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수천 병사를 거느리고 고성으로 전진하여 주둔케 했다.

 도원수 권율은 사천(泗川)으로 전진하여 경상순변사 李빈으로 하여금 전라병사 이시언(李時言)과 함께 咸安으로 나가도록 했다.

 이순신 함대와 수륙협공전을 벌이려 했다.

 9월27일, 이순신이 원균과 함께 전선 50척을 거느리고 한산도를 떠났다.

 적도(赤島:통영·둔덕屯德)을 지나 28일 흉도(胸島:거제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29일 장문포(長門浦:통영군 장수면 장수리)에서 적을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적은 역시 꼼짝도 않고 대항하지 않았다. 겨우 적선 2척을 불태우고 칠천량(漆川梁)에서 밤을 새웠다.

 10월1일, 이순신은 휘하에 있다가 충청수사가 된 이순신(李純信) 등과 함께 영등포(永登浦)로 쳐들어갔으나 적선은 여기서도 싸움에 응하지를 않아 성과없이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2일과 3일 다시 장문포로 들어가 연이어 싸움을 걸어도 배는 험준한 곳 깊숙이 숨겨놓고 육지로 올라가 응전해 오지 않아 철천량으로 성과없이 돌아왔다.

 4일 육군의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과 약속하여 군사 수 백명으로 하여금 배를 내려 장문포 뒷산으로 오르게 하고 수군이 바다로 쳐들어가자 적 진영에 혼란이 일어났으나 산으로 오른 육군이 일본군 1명이 칼을 휘두르자 그만 모두 배로 돌아와 버렸다.

 5일, 바람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6일 다시 장문포로 들어가니 땅에 패문(牌文)을 꽂아 놓았는데 ’明과 화친을 협의중이니 싸울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7일 충청병사 선거이, 조방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 등의 육군이 모두 돌아가고 8일 이순신 함대가 또다시 장문포에 들어가 싸움을 걸었으나 허사였다. 이날 한산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1597년 정유년(丁酉年) 2차 전쟁이 터질때까지 조선군과 일본군은 서로 대치만 하고 있었을뿐 별다른 충돌없이 지루한 강화협상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주변에서 일본과의 화의를 일체 말하지 못하도록 한 선조가 남쪽의 조선군 장수들에게 비밀스런 교지를 내려 팔짱끼고 있다고 책망했으나 다른 한편 9월12일 허욱을 주청사(奏請使)로 北京에 보내 神宗황제에게 일본에 대한 봉공(封貢)을 허락해 달라는 請을 하는 주문(奏文)을 올리게 했다. 그에 훨씬 앞서 4월25일 송응창(宋應昌)에 이어 새로 경략(經略)이 된 고양겸(顧養謙)이 참장 호택(胡澤)을 선조에 보내와 글을 통해 ’일본이 항복을 하고 봉공을 원하여 이를 허락하여 주고 일본군을 완전 철퇴케 하려는데 조선이 먼저 복수심을 버리고 일본에 대해 봉공을 허락하여 달라는 봉공주청(封貢奏請)을 해달라’는 뜻을 전해왔다. 내용은 그러했으나 선조를 꾸짖고 얼르고하여 무례하기 그지 없었다.

 고양겸은 일본과의 강화에서 조선의 방해를 막기위해 선조로 하여금 이를 미리 청하게 했던 것이다. 오랜 논란끝에 어쩔수 없이 이날 허욱을 주청사로 북경에 보냈던 것이며 명나라 조정에서는 풍신수길의 항복문(降表)을 갖고 온 소서여안(小西如安) 일행을 12월7일에야 북경으로 불러들여 책봉사(冊封使)를 일본에 보내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사이 경략(經略)은 고양겸이 7개월만에 물러나고 새로 손광(孫鑛)이 임명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해 11월22일 조선의 함안땅 지곡현(地谷峴:창원군 내서면)에서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소서행장이 마주앉아 위엄을 갖추고 이른바 함안회담을 가졌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8월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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