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28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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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晋州城) 사수 10일만에 전멸...의암論介 순국

 22일 오전 10시부터 적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문경원(聞慶院)의 산 중턱에서 제1총대가, 향교(鄕校) 앞에서 제2종대가 좁혀왔다. 제1파가 하루종일 공격을 퍼부어왔고 수비군도 반격을 가했다. 저녁이 되어 제2파가 몰려와 東門밖까지 다가서 성벽을 기어 오르려 했다. 돌과 화살로 물리쳤다. 사다리는 불화살로 태워 버렸다. 밤 12시 무렵, 2파가 물러가고 제3파가 밀려와 밤 새워 싸웠다.

 23일까지 전투는 계속됐다. 성밖에 적의 시체가 느는 만큼 성 안에도 전사자가 늘어났다. 이날 적은 호의 물을 모두 빼고 길을 성벽으로 이었다.

 24일에도 종일 공격이 계속 되었다. 수비군의 각종 화기가 계속해서 불을 토했다. 각종 총통들이 철환을 뿜어내고 대완구가 진천뢰를 날려 수십명씩 죽음을 안겼다.

 일본군에 신형무기가 등장했다. 구갑차(龜甲車)라 해서 나무궤짝으 네바퀴 수레에 돌려 놓고 병사들이 그속에 들어가 손으로 전진시켜 성에 접근했다. 총탄과 화살로 되지 않자 총통이나 진천뢰로 부셔 버렸다.

 25일 일본군이 동문 밖에 흙산을 쌓고 망루를 세워 놓픈 곳에서 성을 내려 보고 조총과 포를 쏘았으나 수비군도 곧 흙산을 쌓고 총통을 쏘아 망루를 깨뜨렸다. 성의 서북쪽이 뚤려 적군이 성벽을 넘어오자 황진이 나가 막았다.

 26일 적은 가죽으로 덮어 씌운 나무궤짝으로 화살과 총알을 피하며 성벽에 다가섰으나 돌로 내리쳐 물리쳤다. 적이 성안에 불화살을 계속 쏘아대 성안의 초가집들에 온통 불이 붙어 화염과 연기가 가득찼다. 때마침 비가 쏟아지면서 무너진 성벽 틈으로 적군이 넘어오자 김준민(金俊民)이 나가 격퇴했으며, 적의 칼에 죽었다.

  27일 적이 성밖 다섯곳에 흙산을 만들고 대나무 울타리 뒤에서 수천명의 조총병이 한꺼번에 조총을 발사하자 천지가 진동하면서 성안의 수백명이 쓰러졌다. 적이 구갑차로 성밑까지 개미떼처럼 달라 붙었다. 수비군이 마른섶에 기름을 묻힌뒤 불을 붙여 한꺼번에 던지자 구갑차들이 불타고 적병들이 무더기로 타 죽었다. 이날 전투에서 의병부장 강희보(姜希輔)가 전사했다.  

 29일 드디어 진주성 최후의 날이 왔다. 이날 구갑차로 성밑에 달라붙은 적군이 쇠창살로 성벽의 큰돌을 뽑아내고 성벽을 무너뜨리자 적군 장수들이 선봉이 되어 뛰어들고 뒤따라 봇물 터지듯 일본군 대군이 밀려 들어와 성안을 온통 채우다시피 했다.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일본군의 성안 백성들 학살이 시작됐다. 이날 성중의 사자(死者)가 6만이라 했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의병장들이 부장들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이종인 강희열(姜希悅) 오유 李체 등 장수들이 적군과의 백병전 속에서 죽었다. 서예원도 참살을 당했다.

 장렬한 옥쇄였다.

 성이 함락된뒤 일본군 장수들이 남강가에서 승전잔치를 벌였다. 전라도 長水 양가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최경회의 보살핌으로 자란 주논개(朱論介)가 최경회가 죽자 기생으로 꾸미고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군 장수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껴안고 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뛰어들때의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하고 여인의 충절(忠節)로 길이 전한다.

 진주성을 공파한 일본군은 수길의 명령대로 철저한 살육을 저질렀을뿐 아니라 부근 곤양군(昆陽郡) 하동현(河東縣) 악양(岳陽)과 삼가현(三嘉縣) 단성현(丹城縣)까지 휩쓸고 다니며 분탕과 살육으로 1차전 패배를 설욕하고 다녔다.

 4천여 수비군이 10만 대군을 맞아 10여일 가까운 처절한 수성전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조·명 연합군 어느 부대도 구원차 출동하지 않았다. 외로운 항전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최경회와 서례원의 목을 명호옥(名護屋)의 풍신수길에 보내 東京에 효시했다고 전하고 있다. 1차 진주성 패배와 전라도 진격 좌절에 수길의 한이 사무쳤던 것이다.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군 일부는 7월초 전라도로 진격했으며 구례까지 진출했던 명군이 남원으로 후퇴하자 구례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 일본군은 속성(谷城)도 쳐들어가 분탕질을 치다가 7월9일 진주로 돌아왔다. 

 진주성에서 일대 살육전을 벌여 패전의 분풀이를 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퇴군한 뒤 일대에 왜성을 수축하고 장기 주둔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釜山 서생포(西生浦) 임낭포(林浪浦) 기장(機長) 동래(東萊) 金海 가덕도(加德島) 안골포(安骨浦) 웅천(熊川) 거제도(巨濟島) 등 12개 본성과 그에 부속되는 6개 지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7월22일 임해(臨海) 순화(順和) 두 왕자와 그들을 수행했던 黃정욱 황혁(黃赫) 이영(李瑛) 등이 포로생활 1년여만에 부산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때 일본군은 진중에서 성대한 송별연을 베풀었다. 조정은 포로가 된 책임을 물어 黃정옥을 길주(吉州)로 귀양보내고 남병사(南兵使) 이영은 처단했다.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는 8월18일 海州로 옮겨 있다가 9월22일 해주를 떠나 10월1일 폐허가 된 수도 漢城에 환도했다. 한성을 버리고 황망하게 피난길에 나선지 1년4개월만이었다.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 일본군이 들어있던 정능동(貞陵洞)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 집을 행궁으로 삼아 거처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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