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1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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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義兵, 국가방어 위해 봉기(蜂起)

그러나 7월에 들면서 조선군의 저항이 점차 드세지고 조선 전역에서 의병(義兵:민병民兵)이 봉기하면서 일본군의 군수물자 현지 조달은 물론 본국으로 부터의 수송이 갈수록 어려워져 갔다.

조선수군때문에 서해를 도는 수소은 어림없었고 곡창 전라도 진격이 좌절됐다. 거기에다가 경상도 일대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들의 유격전(遊擊戰)이 날이 갈수록 활발해져 도처에서 보급로가 끊겼다.

 일본군은 점차 점령지역 확대 보다도 이미 점령한 지역의 확보와 보급로를 지키는 일에 더 급급해지기 시작했다.

 8월 무렵부터 다음해 봄 부산으로 전면 퇴각할때까지 일본군은 부산과 한성 그리고 평양까지의 주 보급로 경비에 6만여명의 병력을 배치해 두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더해서 한성과 개성 등과 강원도, 함경도 방면의 후방 경비 병력까지 합하면 거의 10만 전후의 벙력이 점령지 및 보급선 확보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공격은 커녕 방어전에도 몰리기 시작했다.

 일본으로부터 10만 수군이 증원, 합류하지 않으면 평양의 소소행장군이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음이 명백해진다.

 일본군은 십리 또는 5-6십리 거리를 두고 험한 곳을 골라 영책(嶺柵)를 세워 병력을 배치했다. 밤이면 불을 지펴서 저희끼리 통했다.

 그러나 의병활동이 거세지면서 이들 영책들도 편치 못했다. 의병들에 수시로 기습을 당했고, 일본군 수송대도 번번이 조선 의병들의 밥이 되었다.

 임진년 겨울쯤에는 비각(飛脚:연락병) 한명을 보내는데도 기병 30~50기, 보병(궁시조총병弓矢鳥銃兵) 100~200명씩으로 릴레이식 호위를 붙여야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조·일전쟁 당시의 조선 의병들은 역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특히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은 구국의 영웅으로 겨레의 수호신으로 영원히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을 비롯한 전쟁영웅들에 대해 그러하듯 의병장들에 대해서도 그 의거를 높이 찬양하고 승의(僧義)의 높은 뜻을 지나치게 기린 나머지 정작 그들의 전공에 대한 연구나 의병의 활동이 전쟁중 어떤 군사적인 의미를 가졌던가에 대한 군사과학적인 조명은 매우 소홀하다.

 전공은 침소봉대 되거나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수식되어 전설적인 영웅으로 승화되고 국민 정서 속에 민간신앙적인 인물들이 되어있다.

 戰史속의 전쟁영웅으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당시 조선 의병들을 현대 군사학의 시각에서 조명하면 정부군(官軍)에 대비한 民兵 또는 스스로 궐기한 시민군(농민군)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정규 편제를 유지하고 정부의 명령에 따른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정규군에 비해 적절하게 편성하여 스스로 전투목표를 선정하여 싸우는 비정규군이라 하겠다.

 의병은 그 동기에서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적군의 침공으로부터 내 가족 내 고장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 동기다. 현대의 향토예비군과 같이 지역방어가 그 목적이었다. 경상도 의병을 비롯 일본군 점령지역의 대부분 의병들이 이 경우였다.

 다른 하나는 임금(勤王)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국가방어 동기다. 특이하게 전라도 의병들이 이 경우였다. 적의 점령아래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으나 전쟁이 터지기 직전 맹랑한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으로 임금(선조)과 조정(나라)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멸문(滅門)의 화를 입었고 반역향이라는 낙인까지 찍혀 벼슬길마저 막혔던 전라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매우 아이러니였기도 했다.

 전라감사 李洸이 지휘하는 관군으로 편성되기는 했으나 전쟁이 터지고 한달만에 4만명이라는 대군이 집결, 근왕을 위해 용인까지 달려 갔으며 高敬命의 7천 의병도 근왕의 기치아래 모였다. 權慄의 전라도군 6천이 수도 탈환전에 참전, 행주대첩을 올리고 김천일(金千鎰)의 의병군이 수원·강화도로 전전한 뒤 2차 진주전(晉州戰)에서 최경회(崔慶會)군과 전원 옥쇄의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등 전라도 의병은 국가방어를 위해 싸웠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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