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과 어진을 지켰던 그 길, 초록 단풍 가득한 정읍 내장산을 찾다
실록과 어진을 지켰던 그 길, 초록 단풍 가득한 정읍 내장산을 찾다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9.06.13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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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도 없었다”<상>
사진=신상기 기자
사진=신상기 기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역사는 기록이다. “정읍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도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록의 중요성 때문이고, 그 중요한 기록이 소실되지 않도록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당당하게 목소리낼 수 있어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목숨을 구걸하기도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위기의 순간 속에서 제 목숨을 내놓고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책을 짊어지고 떠났던 민초들의 길을 따라가 본다.

12일 오전 정읍 내장산 용굴암지로 향하는 길에 섰다. 내장사 입구에서 용굴암까지는 1.8km다. 햐안 운동화 끈을 동여메고, 함께 동행해준 정읍시청 기획예산실 소애숙 홍보팀장과 문화예술과 문화재담당 서인석씨와 그 당시, 정읍사람들의 마음에 닿아보기로 했다.

몇 걸음 옮기자 들어선 상쾌한 숲 속 길에는 싱그러운 초록단풍이 우리 일행을 반긴다. 연록색의 잎과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취했을 즈음, 400여 년 전 정읍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단풍잎을 볼 정신이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온 국토가 전란과 화마에 휩싸이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을 비롯한 윤길, 유인, 안의, 손홍록, 내장산 주지 승병장 희묵 대사가 머리를 맞대고 큰 결정을 내린다. 전주사고를 제외한 춘추관, 충주, 성주 3곳의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평지에 실록을 두는 일은 위험하다는 판단이 빠르게 내려진 것이다. 이에 실록이 소실되거나 강탈당할 것을 염려해 고민 끝에 산중 깊숙한 곳에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위급 상황에서는 바다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는 부안 변산 쪽도 검토되고, 아예 경기전 앞에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내장산의 험준함이 도내에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이죠.”

서인석 정읍시청 문화재담당의 이야기를 들으니 흥미로웠다. 아마도 전라감사의 주관 하에 회의를 하면서, 민주적인 절차로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협치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길을 걷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파른 기울기의 나무데크가 나타났다.

이 아찔하기만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가 바로 실록과 어진을 지킨 곳이었다니, 눈앞이 까마득하다.

은적암으로 올라가는 길. 사진=신상기 기자
은적암으로 올라가는 길. 사진=신상기 기자

물론, 지금에야 나무데크까지 설치해 용굴암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400여 년 전 정읍사람들은 어느 길로 용굴암까지 올라갔을까? 그것도 이 무거운 책들을 한가득 짊어지고서 말이다. 목숨을 걸고 실록과 어진을 지켜낸 그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은 어느새 한 짐이 되어 가슴 속에 쌓이기 시작한다.

손홍록과 안희, 희묵대사 등을 중심으로 한 정읍인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 805권과 고려시대 발간된 책 538권을 예순여 개의 궤짝에 나눠 담고 전주사고에서 정읍 내장산까지 60km를 옮겨왔다.

그리고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은봉암(은적암)을 보존장소로 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서인석 문화재담당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음력 6월 22일 조선왕조실록이 은봉암에 도착하고, 음력 7월 1일 태조어진이 용굴암에 도착한다. 이후 더 험준하고 깊은 산중인 비래암으로 실록과 어진을 모두 옮겨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음력 7월 14일 실록을 비래암으로 옮기고, 음력 9월 28일에는 어진을 비래암으로 옮긴다.

그리고 밤낮 홀로 아니면 둘이서 보초를 서면서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된다. 이는 전쟁이 잠잠해지는 이듬해 7월 9일 정읍현에서 실록과 어진이 다시 반출돼 옮겨지기까지 370여 일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아쉽게도 이날 탐사에서 만날 수 있었던 실록과 어진의 보관터는 은봉암까지가 최선이었다. 실제로 비래암은 너무 깊고,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현재로써는 찾아갈 길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험준한 곳까지 그 많고도 많은 책들과 바라보기도 부담스러웠을 어진을 옮기는 손길은 얼마나 뜨거웠을까? 정읍사람의 두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부끄러워질 즈음, 절벽 위 수직 석벽의 동굴 속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만진다.

김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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