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람들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태조어진
정읍사람들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태조어진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9.06.1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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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이 없었다면 조선 역사는 없었다”<중> 안의와 손홍록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 ‘임계기사’
'임계기사'의 첫 페이지에는 "임진년 6월 22일 실록이 왜적을 피하여 전주로부터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겨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직유생 안의, 손홍록의 이름도 보인다.

 6월 22일 ‘문화재지킴이의 날’이다.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긴 날인 1592년 6월 22일(음력)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념비적인 날에 아주 중요하게 기억해야 하는 두 인물이 있으니, 바로 과거 태인현의 선비 안의(安義, 1529~1596)와 손홍록(孫弘錄, 1537~1610)이다. 이들은 정읍 내장산에서 383일 동안 실록과 어진을 지켜낸 것도 모자라, 정읍현, 아산현,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지기까지 실록과 동행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이들이 지켜낸 실록은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고 원본을 바탕으로 5부가 더 간행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편집자주>  

 정읍사람들이 지켜낸 책,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은 그 가치를 세계에서도 인정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초기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들의 역사를 담은 기록물이다. 임진왜란때 정읍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킨 실록은 이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태조에서 명종까지 200여 년의 기록이다. 만약, 정읍사람들이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회복할 수 없는 반쪽이 되고 말았을 터다.

 정읍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킨 조선 전기 200년의 역사 만큼이나 중요한 기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 ‘임계기사(壬癸記事)’다.

안의가 남긴 ‘임계기사(壬癸記事)’는 탐진안씨 문중에서 대대로 종손에게만 전해져 오던 가보였다. 따라서 학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에서야 그 가치를 조명받으며 실록의 초기 피난과정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참고자료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임계기사’에는 안의가 손홍록과 함께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수직한 전 과정이 기록으로 담겨있다.

1592년 6월 22일부터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긴 사실과 7월 14일에 비래암으로 다시 옮기는 과정 등 실록의 보존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담겨져 있다. 당시 현장에 누가 다녀갔고, 또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 것이다.

 이를 검토해 보면, 안의의 단독 수직일은 174일이며, 손홍록의 단독 수직일은 143일로,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는 66일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이 윤번으로 돌아가며 수직을 했거나 함께 수직했던 수직일수를 모두 합하면 383일에 이른다.

'임계기사' 의 '수직상체일기'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임계기사' 의 '수직상체일기'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유월이십삼일 용굴암에 머무르며 지키기 시작함 참봉 오희길 유인 모두 내려감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지킴"이라고 쓰여있다.

 ‘임계기사’의 내용에서 어진과 실록에 대한 이들의 수직상황은 1593년 7월 19일 아산현에서 충청 검찰사 이산보(1539~1594)에게 인계하고, 7월 24일 강화도까지 동행한 것으로 끝나있다.

 그중에서도 이산보의 상소문을 통해서는 실록과 어진의 수호와 이안에 있어 발생되는 비용과 인력들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태인에 거주하는 유학 안의와 손홍록은 평소 집안에서 좋은 행실이 있던 자들로 변란이 일어나는 초기부터 내장산에 진전(眞殿, 御眞)을 모셨는데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수직(守直)하면서 시종토록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또 자비로 양식과 말을 준비하여 천리길을 호종(扈從)하여 함께 행재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충의(忠義)가 가상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뢰는 일입니다.”

 이처럼 ‘임계기사’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록물로 주목된다. 뒤늦게 밝혀졌지만, 날짜별로 상세하게 정리해두고 있어 그 역사적, 사료적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지난 2017년 3월 31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정읍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랜 시간 ‘임계기사’를 연구해온 이용찬 정읍학연구회 사무국장은 “그동안 임진년과 계사년 현장에서 기록된 ‘임계기사’가 학술적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던 사이, 그보다 200년 후에 기록된 ‘호남절의록’이나 그로부터 30년 후에 발간된 ‘이재유고’에 의해 ‘조선왕조실록’의 초기 피난 과정에서의 주역이 정읍 선비들이 아닌 오희길의 개인적 공적으로 탈바꿈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지켜낸 정읍 사람들의 기상과 역사적 사명감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했던 것일까?

 안의와 손홍록이 실록과 어진을 피난하고서도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고 한사코 관직에도 나가지 않았던 점, 또 이산보의 상소문에서 보듯 “자비로 양식과 말을 준비”했다는 기록에서도 살필 수 있듯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비로 부를 수 있을 터다.

 이에 대해 지역 향토사 연구가들은 안의와 손홍록의 스승이었던 일재 이항에 대해 언급한다.

 서인석 정읍시청 문화재담당은 “일재 이항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안의와 손홍록 뿐 아니라 다수의 후학들이 있으며 현실참여형의 학문을 가르쳤다”면서 “그의 후학들은 전쟁발발과 함께 의병으로 참여했고, 국난의 시기마다 호남 지역의 선비들의 숨은 선비정신이 발휘되었다”고 해석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녀낸 정읍 사람들, 선대의 발걸음을 적어놓은 귀한 책 ‘임계기사’를 대대손손 지켜낸 탐진안씨 문중, 또 이를 세상에 드러내게한 향토사 연구자까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정읍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켜켜이 흐르고 있다.

 김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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