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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충신,친일파에 파면 당하다<17>정산군수와 최익현 조우
하대성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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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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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의 꽃을 피운 어진화사. 민족정기와 충의정신을 목숨처럼 아꼈던 작가. 상업미술 효시인 공방을 최초로 운영한 프로 화가. 이는 전북출신 어진화가 석강 채용신(1850-1941)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채용신 탄생 160주년, 서거 70주년을 맞은 2011년.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채용신을 주목해야 하는가. 조선정신에 오롯이 마지막 정점을 찍었던 화가로서의 면모, 사진속에 함몰된 고유의 미학적 전범들, 그가 도달한 전통 초상화의 지평이 사라져 버렸다. 진정한 조선의 혼과 정신을 지독하게 고집한 채용신. 일제,미군정,현대라는 시대 흐름속에서 우리는 그 전통성을 잃어버렸다. 숭고한 정신을 되찾고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때다. 채용신이 추구하고 이룩한 가치가 너무나 크고 고귀하다.
  그가 일군 화력(畵力)과 시대정신을 좇아 90평생의 여정을 겸허히 따라가 본다. 루트는 탯자리인 서울 삼청동에서 유택(幽宅)인 익산 왕궁 장암리까지. 채용신의 후손과 전문가, 향토사학자, 지역원로들이 함께 했다.

   
▲ 면암 최익현 사당인 모덕사 전경

<17>정산군수와 최익현 조우    

1904년 가을, 채용신은 부친 3년 상을 마쳤다. 고종은 총리대신 윤용선(尹容善)에게 천거하도록해 채용신을 충남 정산군수(현 청양군수)로 임명했다. 시묘살이 중에도 몇차례 출사를 요청받았으나 채용신은 거절했다. 어찌 부친 상중에 관직에 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하수상해도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여겼다.

뭇서리가 내린 초겨울 새벽, 채용신은 화첩이며 지필묵,옷가지 등 가볍게 꾸린 행장을 말잔등에 얹혔다. 그리고 부임지 정산으로 출발했다. 왕궁에서 여산,강경를 지나 부여를 거쳐 정산까지는 말타고 꼬박 하룻길이였다.

#만향정과 백련지 연향 그윽

산악이 중첩된 고장 정산은 동에서 서로 칠갑산이 뻗쳐있다. 구름의 기복 또한 심한 편이었다. 금강 지류인 치성천과 잉하 달천이 흐르고 있었다.

   
▲ 옛 정산군청 자리인 정산면사무소
채용신이 본 정산군청은 아담했다. 청사 주변으로 아름드리 나무가 즐비하고 옆엔 백련지(白蓮池)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선조 20년(1587년) 송담 송남수 정산현감이 만든 연못에 역시 정산현감으로 있던 사계 김장생이 심었다는 백련이 꽃을 피우면 만향정(晩香亭)과 어우러져 운치를 그만이다는 얘기도 들었다. “달빛아래 희디 흰 백련 거울같이 피어/ 그윽한 향기 못 위로 떠서 그림자 따라 배회하네” “울타리 아래 노란 국화가 좋아/ 꽃 중의 숨어 사는 군자로다/ 차가워져도 살아 있는 것은 드물고/ 엄한 서리 내리는 밤도 두렵지 않도다.” 230여년전 조발 정산현감과 조선 후기 실학자인 김육이 지은 시가 걸려 있는 만향정에 오른 채용신은 고을을 관망했다.

이 백련은 다른 곳으로 옮기면 죽는다는 전설을 갖고 있어 신비감마저 들었다. 봄이면 하얀꽃에 향기가 서정리 일대에 그윽했을터. 동네에 정산향교가 있어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리랴. 지금도 이 일대에는 옥이 있었다는 ‘옥거리’,백정이 살던 마을로 돌다리에 소가죽을 널어 말렸다는 ‘피촌말’이라는 조선시대 지명이 남아 있었다.
 

#꿋꿋한 기개·애국정신에 감화

   
▲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화

부임한 다음날 업무보고를 받은 채용신은 인사차 정산향교에 들렀다. 그리고 면암 최익현이 사는 목면 송암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정산 사정리에서 송암리(현 모덕사)까진 30리, 말타고 한시간 남짓한 거리다.

   
▲ 채용신과 최익현이 만났던 면암 고택.


채용신은 면암을 처음 뵙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문인의 몸으로 무관이 무색할 만큼 꿋꿋한 기개에 놀랐다. 조선의 장래을 생각하는 애국정신에 크게 감화됐다. 채용신은 그를 스승으로 받드리라 결심했다. 이 때부터 틈나는 대로 애국지사(愛國志士)와 거유(巨儒)의 초상을 그려 후세의 귀감으로 삼길 원했다. 공사(公事)로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붓을 자주 들었다. 스승 최익현상(崔益鉉像)은 물론 그의 제자 항일의병장이었던 임병찬(1851-1916), 윤항식(尹恒植1855-?)의 초상화을 만들었다. 송사를 물 흐르듯 집행한 채용신은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렸다. 이 때 상황은 채용신의 평생도 제7폭인 도임도(到荏圖)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듬해인 1905년 채용신은 최익현 73세 전신좌상을 그렸고 종2품(從二品)으로 승차했다. 그 기쁨도 잠시였다. 국운은 기울기 시작하여 사실상 외교권 박탈이라 할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됐다. 이 조약에 서명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이른바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요구가 들불처럼 번졌다. 민중식 의병장을 비롯한 창의가 곳곳에서 일었다.

#관군-의병 충돌은 막아야 한다

1906년 정산주민들은 4월16일자 황성신문에 채용신 관련 광고를 냈다. ‘채용신 정산군수가 부임한지 한해가 됐다. 떠날때가 됐는데 치적이 많아 정산군수직을 더 수행하길 원한다. 군민들이 원해서 광고를 했다.’는 내용이다. 정산군민들이 채용신 군수를 유임시킬 것을 고종황제에게 탄원한 것이다. 이 광고를 주민들이 왜 냈을까. 사학자들은 송덕비 건립과 함께 이런 광고를 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며, 이는 채용신의 선정으로 인한 주민들의 애정어린 표시였던 것이다.

   
▲ 정산주민들이 채용신군수의 유임을 요청하는 황성신문의 광고.
조선을 그토록 사랑했던 채용신, 고종의 충실한 신하였던 채용신, 주민을 덕으로 다스렸던 채용신, 그는 친일파에겐 눈엣가시였다. 이 나라 백성인 의병들에게 창검을 겨눠라 말인가. 채용신은 관군과 의병의 충돌을 막고자 고민했다. 의병들이 군청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한 채용신은 인장을 가지고 자리를 피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 즈음 여기 저기에서 채용신의 탄핵작업이 감지돼기 시작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근대정부기록을 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가 나온다. 1906년 3월27일 충청도 관찰사 서리 직산군수 곽찬이 내부대신 이지용과 외부대신 박제순 앞으로 “채용신이 보고도 없이 인장을 지참하고 지역을 이탈했으니 면직해야 한다”며 청원서를 낸다. 이지용,박제순은 누구인가. 을사오적이다. 이들은 4월2일 상정된 채용신 면직안을 전격 가결처리했다. 채용신은 결국 친일파에 의해 파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친일파에 동조하지 않은 죄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06년 관직에 물러난 채용신은 향리인 익산 왕궁 장암리에 내려가 칩거한다. 그가 관직에 나간 지 20년 만의 일이요, 그의 나이 57세였다.
글·사진=하대성기자,동영상=이형기 프리랜서
 


 ■  도움말 주신 분 조선미 성균관대 교수, 김호석 초상인물화가, 전우용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센터 교수,이원복 중앙박물관 학예실장, 이흥재 전북도립미술관장, 이용엽 국편사료조사위원, 변종필 미술평론가, 이철규 예원예술대 교수,

 ■ 공동기획   전북도민일보사 - 전북도립미술관 - 익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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