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117> 차의 길 20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117> 차의 길 20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2.02.2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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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완(靑磁碗, 고려 10_11c), 국립청주박물관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까. 시간을 즐기는 것은 특별한 재주가 필요치 않고, 주어지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여가를 즐기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도 있다. 시간을 잘 쓰는 요령을 모른다면 삶의 질은 향상되지 않을 것이다.

  여가는 외면보다 내면의 시간이 중요하다. 내면의 정신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한다면 저절로 터득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은 하루아침에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음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가의 즐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하루에 한 시간의 여가, 차 명상시간을 나에게 선물한다면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는 조금의 마음 챙김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먼저 차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챙김 명상을 해보자.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물 끓임에 세심해야 한다. 찻물 끓임에는 세가지의 큰 분별법이 있다. 첫째는 모양을 보고 구별하고, 둘째는 소리로 구별하고, 셋째는 김(수증기)로 구별한다. 모양을 보고구별하는 것은 내변(內辨)이며, 소리로 구별하는 것은 외변(外辨)이며, 김(수증기)으로 구별하는 것은 첩변(捷辨)이다. 그 외에도 작은 분별법이 있다. 이러한 분별은 차맛을 결정하기 때문에 잡념을 떨치고 집중해야 한다. 옛 사람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이러한 과정을 익혔으며, 차를 마시는 과정은 선의 경지에 드는 것으로 비유됐던 것이다. 또한 이러함은 일상속에서 존재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 삼탄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성기인 세종의 성세를 누렸던 15세기의 인물이다. 그는 장소에 관계 없이 항상 담연한 마음으로 대은(大隱)을 꿈꾸었다. 대은이란 속세에 사는 신선처럼 산림에 은둔하지 않고 조정에서 벼슬하되 명리(名利)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삶이라 하였다. 산림과 조정 두 경계의 모순 없이 자유로이 즐기는 경지가 바로 대은의 경지로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는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중에 차와 관련된 일미선(一味禪)에 관한 시가 있다. 일암 전 장로에게 주다(「증일암전장로(贈一庵專長老)」 라는 시의 뜻을 새겨보자.

 

  인생살이 번뇌 다 떨쳐 버리고

  깊은 선정에 들었네.

  몸이 한가하니 늙지 않을 것이고

  마음은 고요하니 잠이 더 없어졌네.

  약 재료는 대바구니에 담아 말리고

  차 단지엔 눈 녹인 물을 끓이네.

  참으로 가여운 것은 속세의 사람들이니

  늘 몸이 얽매여 애를 쓰는 거네.

 

  이 시에 등장하는 일암은 조선 전기의 고승으로 승려였으나, 술과 바둑을 좋아하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따라서 삼탄 이외에도 신숙주ㆍ서거정ㆍ성삼문 등 당대의 문인들과 두루 교유한 인물이다. 백년의 번뇌를 털어버리고 깊은 삼매경에 들으니 몸은 한가하여 늙지 않고, 마음은 고요하다는 시로 시작한다. 차를 마시기 위해 눈 녹인 물이 끓고 있으니 신선이 된 듯하여 늘 몸이 실타래처럼 얽혀 애를 쓰고 있는 속세의 사람들이 가엽다는 시이다.

  요즘같이 복잡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여유시간을 많이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잠깐 시간을 내어 차를 마시며 정교한 마음 훈련을 한다면 분명 즐거움과 사리를 헤아릴 수 있는 혜안을 가질 것이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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