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움’ “경계하라 파시즘이라는 괴물의 출현을”
‘엘리시움’ “경계하라 파시즘이라는 괴물의 출현을”
  • /노컷뉴스
  • 승인 2013.08.15 16: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빈자리에 괴물들이 나타난다.”

 - 안토니오 그람시 

 

 외계인의 침공 탓에 지구가 쑥대밭이 된다는 SF 재난 영화의 진부한 공식을 보기 좋게 뒤튼 영화 ‘디스트릭트9’(2009년)을 통해 닐 블롬캠프 감독을 알게 된 관객들은 그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려 왔을 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블롬캠프 감독은 흑인을 백인으로부터 격리시키던 자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10대 시절까지 봐 온 까닭인지 디스트릭트9에서 외계인을 끌어들여 계급, 인종 차별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감수성 예민한 이 젊은 감독이 4년 만에 신작 ‘엘리시움’을 들고 돌아왔다. 그가 이번에 현미경을 들이댄 곳은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본주의 체제다. 

 사실 걱정도 있었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들어간 만큼 그들의 흥행 공식에 맞추다 보면 감독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못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블롬캠프 감독은 SF 장르가 가진 상징과 함의를 영리하게 활용해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를 만족시킨 영화적 재미는 물론 사회적 메시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모습이다. 

 그가 각본, 연출, 제작을 맡은 엘리시움은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밑거름으로 우리에게 다양하고도 뚜렷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체제의 맹점에 관해서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통해 폭넓게 회자되고 있는 바, 이를 제외했을 때 “괴물들이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라”는 엘리시움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뇌리에 박힌다. 

 2154년 인류는 둘로 나뉘었다. 하층민을 모아 놓은 황폐해진 지구와 상류층만 살 수 있는 초호화 우주 정거장 엘리시움이 그 면면이다.  

 극중 지구인은 하층민의 대명사 격인 멕시코 이주민들이 쓰는 스페인어를, 엘리시움의 시민은 19세기까지 전 세계 귀족들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양극화의 극단을 보여 주는 이러한 장기판 위에 놓인 중요한 말은 셋이다. 지구에 사는 전과자 출신의 공장 노동자 맥스(맷 데이먼), 엘리시움의 국방장관 델라코트(조디 포스터), 그리고 지구에 살면서 엘리시움의 조력자로 활동하는 퇴역 군인 크루거(샬토 코플리). 

 맥스는 사람을 대신해 엘리시움 시민의 가정부, 경호원 노릇을 하는 로봇인 드로이드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노동력을 착취 당한다.

  소위 ‘노동 시장 유연화’라는 말로 포장된, 언제 무슨 일로 해고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일하던 그는 관리자의 압력에 못 이겨 고장난 생산 설비를 고치려다 방사능에 노출돼 5일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떠안게 된다. 

 그러한 맥스에게 주어진 운명은 해고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시트 더러워지니 어서 내보내”라는 사장의 냉혹한 말과 진통제 한 통뿐이었다. 

 그렇게 맥스는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엘리시움에 가야할 이유가 생겼고, 그 티켓을 얻기 위해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기계 장치를 몸에 박은 뒤 자신이 일하던 공장 경영자의 뇌에서 정보를 빼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엘리시움의 국방장관 델라코트는 “썩어빠진 정치권으로부터 엘리시움을 구해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산다. 

 목숨을 걸고 지구에서 엘리시움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그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라틴 아메리카 이주민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외치는 네오콘(신 보수주의자)의 모습 그대로다. 

 지구인이 자신의 포위망을 뚫게 될 위급한 상황이 올 때면, 델라코트는 강간,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지른 탓에 법적으로 임무를 맡겨서는 안되는 용병 크루거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델라코트는 쿠데타를 꿈꾼다. 자신이 엘리시움의 안전을 책임질 적임자라는 오만함이 그 원동력이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엘리시움의 운영 시스템을 소유한 기업가에게 “향후 200년간 독점 계약권을 줄 테니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달라”고 제안한다. 

 공교롭게도 그 제안을 받은 기업가는 맥스가 일하던 공장의 사장이었다. 그는 델라코트의 요구대로 조작한 시스템 정보를 들고 엘리시움으로 향하던 중 맥스의 공격을 받는다.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지구의 하층민도 최첨단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등 엘리시움의 운영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보가 노동자 맥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델라코트는 맥스를 잡아들이는 데 또 다시 문제의 인물인 크루거를 끌어들인다. 갖가지 범죄를 저지른 탓에 퇴역했던 그는 그렇게 중용되고, 맥스가 엘리시움의 운영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 뒤로 엘리시움을 장악하려는 야망을 드러낸다. 

 엘리시움의 권력자인 델라코트의 도움으로 다시 태어난 크루거는 결국 엘리시움을 위협하는 최강의 적으로 커 버린다. 

 독일어 억양이 강하게 섞인 듯한 영어를 쓰고, 등에 일본도를 짊어진 크루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식적으로는 유폐된 파시즘 그 자체다. 

 반 파시즘 운동을 벌이던 중 무솔리니 정권의 탄압으로 1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맞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치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옛것이 죽고 새것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빈자리에 괴물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 괴물은 바로 파시즘이다. 국가 권력을 앞세워 소수와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고, 자국민의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나라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그곳 국민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한 그 논리 말이다. 

 수많은 모순을 품은 낡은 체제가 무너졌을 때 무엇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인류를 잔인하고 무자비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법이다. 

 1930년대 선동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나치)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독일은 제국주의 국가간 전쟁으로 피로도가 누적되고 1차 세계대전 배상금 지불 문제로 대량 실업과 공황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고 진공 상태가 이어질 때 파시즘은 괴물처럼 출현한다. 

 대지진과 불황으로 불안에 떠는 지금 일본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내세우는 보수당이 집권한 뒤 빠르게 우경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네오콘, 독일의 네오나치즘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 긴밀하게 엮여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리라. 

 이 영화 속 노동자 맥스처럼 현재의 시스템을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할 열쇠를 쥔 것은 대다수 서민일 터다. 맥스가 엘리시움에 가야 할 이유와 자신의 희생이 가져올 희망을 찾은 것처럼, 우리 각자의 각성과 그에 따른 실천이 시대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뜻깊은 메시지를 품은 이 영화를 보다 많은 관객이 공식적으로는 볼 수 없다는 데 아쉬움이 남는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극중 인체 훼손 장면이 문제가 된 듯한데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상징적인 장면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해석한 탓으로 여겨진다.

 

/노컷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