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출신 역사적 인물 5인의 일대기
군산출신 역사적 인물 5인의 일대기
  • 정준모 기자
  • 승인 2013.07.11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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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군산은 정치·스포츠·문화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긴 숱한 명사들을 길러냈다.

 최근 군산문화원은 군산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 5명을 동화형식으로 담은 책(책명: 우리고장 역사인물을 찾아서)을 발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풍전등화에 놓인 조국을 위해 일평생 몸을 바쳤고 굶주리고 병든 환자들에게 의술을 베풀었고 한국 문단 발전에 큰 획을 그었고 암울하고 힘든 시절 꿈과 희망을 선사했던 한국사에 영원히 기억될 인물들이다.

 이분들의 존엄하고 거룩한 일대기를 따라가 봤다. 

◇임진왜란의 명장

최호장군
  최호장군은 1536년(중종 31년) 개정면 발산리에서 경주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74년(선조 7년)에 39세의 나이로 무과 병과에 급제한 데 이어 1576년(선조 9년)에 무과 중시갑과에 장원급제했다. 1592년 야욕에 찬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침범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일본 침략에 맞서 아무런 준비가 없던 조정은 평안도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고 당시 선조 임금의 안위를 책임진 호위 무사가 바로 최호장군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적의 보급선을 끊어 일본군 침략을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한, 1596년 (선조 29년)충청도 병마수군절도사였던 장군은 이몽학 난을 진압해 청난 공신 2등에 책봉됐다. 이듬해 1597년 또다시 일본이 침략(정유재란)하자 장군은 노구를 이끌고 선봉에 선다.

  그러다가 불행하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는 운명을 맞는다.당시 61세.

  왜란 후 선조는 최호장군에게 호신용 보검인 삼인보검과 ‘충원군’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군(君)은 임금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명칭이라는 사실로 감안할 때 장군에 대한 선조 임금의 각별한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항일의병의 선구자

▲ 임병찬 장군
  임병찬 장군은 1981년 옥구에서 태어났다.

 1888년(고종 25) 호남지방에 대흉년이 들었을 때 진휼(軫恤)의 공을 인정받아 1889년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고 낙안군수 겸 순천 진동첨절제사로 임명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2월 최익현 열사와 대규모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일전을 불사하는 등 항일투쟁에 진력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총독 등 일제 관헌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해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일제 통치에 대한 부당성을 대내외에 알리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6년 거문도로 유배된 임병찬 장군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축구 전설 채금석 선생

▲ 채금석옹
  대한민국 축구역사를 따질 때 군산을 빼놓을 수 없고 맨 먼저 떠오르는 인물 하면 단연 故 채금석 옹이다.

 구암동에 태어나 군산 제일중·고 전신인 영명중에서 축구를 시작한 고인은 일제 강점기 시절 ‘오토바이 채’로 불릴 만큼 빠른 돌파력과 뛰어난 실력으로 조국을 빼앗겨 설움에 빠진 우리 민족에 용기를 줬다.

 1934년 조선대표 선수로 중국 톈진 국제 축구 경기에 출전한 선생은 걸출한 기량을 선보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드높였다.

 1936년 국가대표를 역임한 후 1995년 숨을 거두기까지 후진양성을 하는 등 일평생을 축구인으로 살아왔다.

 선생의 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군산에서는 금석배 전국 학생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근대문학의 거장 백릉 채만식

▲ 백릉 채만식
 1930년대 어두웠던 시대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소설‘탁류’의 작가는 1902년 임피면에서 출생했다. 임피보통학교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고 생전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희화기법으로 냉소적 풍자문학의 진수를 보여줬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그는 이후 기자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역설적 풍자기법이 돋보이는 ‘태평천하’와 1930년대 부조리한 사회상을 통속적 시각으로 그려낸 ‘탁류’ 등을 발표했다. 광복 후 자전적 성격의 단편 ‘민족의 죄인’을 통해 친일 행위를 고백하며 최초로 친일을 인정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폐결핵으로 작고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금강하구둑에 ‘채만식 문학관’이 건립·운영중이고 지난 2004년부터 ‘채만식 문학상’이 제정돼 불후의 명작을 발굴, 시상하고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 故 쌍천 이영춘 박사

▲ 쌍천이영춘 박사
  이영춘 박사는 1903년 평남 용강군에서 태어났지만 군산은 그의 정신적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다. 쌍천은 1935년 당시 옥구군 개정면 소재 구마모토 농장의 자혜 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군산과 인연을 맺었다.

  해방 후 1948년 개정진료소를 종합병원인 개정중앙병원으로 승격시키는 등 천막병원에서 농촌보건사업을 시작해 유명을 달리한 80년까지 농촌위생원, 시그레이브 기념병원, 군산간호대학, 모세스 영아원을 설립하는 등 일평생을 ‘질병 없는 이상촌’ 실현에 헌신했다.

  도지정문화재 200호로 지정된 박사의 생전 가옥은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군산=정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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