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 학도병 전종환씨의 참혹한 증언
6.25참전 학도병 전종환씨의 참혹한 증언
  • 임동진기자
  • 승인 2013.06.2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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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소집돼 포항작전에 참전해 국가 운명을 수호하는 일익을 담당했던 전종환 옹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며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1950년 7월 13일, 또다른 나의 운명의 날이 시작됐지….전주 북중 6학년때 군인들이 와서 군사훈련을 시키려고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군가도 가르쳤어. 어느 덧 63년이 훌쩍 흘렀네.”

제63주년 6.25 전쟁을 하루 앞둔 24일 만난 한 참전 노병의 주름진 얼굴에는 온갖 회한이 서려 있었다.포송포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앳띤 얼굴로 자신의 키보다 큰 소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전주역에서 화물차에 올라 전쟁터로 떠났던 한 소년병사는 이제 팔순의 원로인사가 돼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렸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포항전투에 투입됐던 전종환(81·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우성아파트 112동 1302호) 옹이 바로 그 주인공.

그는 60년을 훌쩍 넘긴 지금, 당시의 처참하고 참혹했던 전장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전주 북중에서 같이 착출돼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익산역으로 향하던 기억들….그리고 36명씩 편성받은 학도병들이 익산역에 도착하자 마자 시작된 전투기들의 무차별 폭격과 참사 등, 그리고 순천농업학교에서 진행된 일주일간의 학도병 군사 교육 모두가 마치 어제일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훈련을 마친 전 옹을 비롯한 학도병들은 1950년 8월 15일 마침내 대구역으로 이송됐다. 대구역 광장 땡볕에서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달랜 학도병들은 대구의 낭산국민학교에서 중앙 제5교육대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이때사 제대로 된 군복도 처음 받았다고 한다. 9710385 학도병 군번(학도병 이후 재발급 받은 군번 so 0003724)도 이때 부여 받았다.

1950년 8월 20일, “이몸이 죽어서 이슬 같이 죽겠노라” 군가를 목이 터려라 외치며 육군 6사단 19연대 1대대에 편성받은 전종환 옹은 의흥군 의흥지역에 위치한 1대대 본부, 능선에 처음 투입됐다. 의흥 산 능선을 오르다 인민군의 박격포 포탄이 날아와 동기생이던 유영근 학도병이 포탄에 산화를 두눈으로 직접보고 전장의 참혹함을 확인했다.

몇일간 지속된 소름이 끼치는 전장의 비극, 인민군의 포탄소리가 산하 곳곳에 울려 퍼지면서 두려움도 밀려왔지만, 내 조국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으로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고 한다.

지휘관들은 무조건 총을 쏘라고 하고, 총탄에 쓰러지는 전우들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고 한다. 십자가 모형의 처형대에 묶여 총살을 당할 위기도 처했지만 다행히 모면했다고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쟁의 무서움을 너무 몰라….방금까지 옆에서 웃어주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조국, 내 강산을 지키려는 한마음도 강해졌지.”

전종환 옹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뒤 전라북도 기획관과 순창·완주군수, 정읍·군산·이리 시장을 거쳐 지난1992년 전북도 기획관리실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최근에는 전라북도교통문화연수원장, 전라북도애향장학재단 감사·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지역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임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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