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끄면…
TV를 끄면…
  • 이동희
  • 승인 2013.02.06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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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TV를 바보상자라고 일컬었다. 그것은 의도된 기획 아래 최첨단의 장비를 이용하여 제작한 영상에 빠져들다 보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고 작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TV 활용법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뇌의학자들과 교육학자들은 근심 어린 주장을 해왔다.

인간의 뇌 중에서도 전두엽은 오랜 진화를 통해서 개성, 인격, 판단력, 창의성, 독창성 등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능력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왔다. 전두엽이 망가지면 수치심도 사라지고, 말수와 의욕도 줄어들어 후안무치하거나 멍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전두엽을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TV는 이를 결정적으로 방해한다는 것이다. “전두엽을 활성화하려면 ‘보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TV 보는 것에 빠져 있으면 생각하는 힘이 퇴화한다.”(하재근『 TV쇼크』경향에듀. 47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뿐만 아니다. TV에 장기간 노출된 성인들도 획일화된 사고방식에 중독되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둔화한다고 한다. 우리들이 부지불식간에 사용하는 말 중에 “TV에 나왔던데…”나 “TV에서 봤는데…”라는 말은 어느새 ‘확인된 사실’이라거나 ‘검증된 진실’이란 뜻과 동의어가 된지 오래다.

TV 근거론이나 TV 전거론과 다른 주장이나 의견을 제시하려면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런 영상이미지에 중독된 사람들의 뇌에 전혀 다른 이물질-책을 몇 권 주입하는 것만큼이나 지난하다. 눈으로 본 것만큼이나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 눈으로 본 영상이 실은 고도의 계산 하에 만들어지고 꾸며진-편집된 사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최첨단 정보에 접속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P.브르디외라는 인류학자는 앞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TV가 전하는 영상이 사실과 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텔레비전이 그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특히 정치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자연재해, 사건, 화재 등 단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즐겨 다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건, 사고는 정치 공백화 현상을 만들고, 사회적 삶을 탈정치화시키며, 일화나 소문으로 축소시켜버린다.”

그의 주장을 듣노라면 섬뜩한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 진다. 나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판단마저도 이미 주입된 영상이미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현 정부 5년 내내 언론, 특히 공중파 방송의 정권장악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야당이나 시민단체, 뜻있는 언론인들이 아무리 항의를 해도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내 줄기차게 입맛에 맞는 방송을 해왔다.

요즘 TV를 켜면 무슨 예능 프로그램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또 무슨 경쟁프로그램들은 또 그렇게 우후죽순인지, 온 나라, 온 국민들이 먹지 못해 걸신들린 것처럼 먹을거리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느라 TV가 바쁘다.

사회가 깊이 생각하기를 멈추고 감각적인 것에 빠져들수록 예능의 인기가 높아지고, 예능 인기가 높아질수록 사회가 점점 더 얕아진다. 또 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구조적 모순을 따지는 깊고 추상적인 생각을 더 이상 못하게 되는 분위기에서 예능의 인기가 올라간다. TV는 시청률이라는 편리한 잣대를 들고 오늘도 내일도 얄팍하고 천박한 쇼를 화려하게 보여준다.

TV가 아무리 유혹을 해대도 안 보면 그만이다. 지난 대선이 끝나고 신문과 TV 시청도 시들해서 한동안 멀리했다. 한동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 그렇게 멀리 둘 것 같다. TV 시청 시간을 줄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들려주는 소리를 아니 들으니 듣고 싶은 소리를 찾아 듣게 되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신세계인가!

우선 책방나들이가 잦아졌다. 우리나라에는 서점보다 출판사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출판사들이 도산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출판사들이 나타나서 책을 찍어내고 있다. 책방에서 책들을 들춰보노라면 한 시간은 금방이다. 또한, TV를 끄니 운동시간이 늘어났다. 9시 뉴스를 외면하니 천변 걷기 시간이 늘어났으며, 연속방송극을 사양하니 독서시간이 많아졌다. 이보다 더 큰 소득은 내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심신이 건강해지려면 (바보상자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이 낫고, 읽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나으며, 쓰는 것보다 (운동)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래도 TV금단현상을 이겨낼 수 없을 때는 마지못해 EBS를 찾는다. ‘흑백TV를 보고 자란 사람은 꿈도 무색으로 꾼다’고 한다. 교육방송이란 책무 아래 우리들 삶에 색깔을 입히는 몇 프로그램들이 있어 다행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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