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야할 직위지상주의(職位至上主義)
사라져야할 직위지상주의(職位至上主義)
  • 유춘택
  • 승인 2013.01.08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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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함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상대적 불행지수는 어쩔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으로 치더라도, 요즘 우리는 전근대적 망령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을 견주어 서열을 매겨보는 기준만도 무한정으로 많다. 이를테면 인물이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기준, 학력의 높고 낮음, 부인의 미추, 자녀의 재주가 좋고 나쁜 그런 것 들이다. 이렇게 견주다보면 동일한 사람이라도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높고 어떤 기준에서는 서열이 낮기도 하다.

관청이나 기업에서 직위가 높거나 낮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서열을 결정짓는 많은 기준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은 직위의 기준을 서열을 매기는 많은 기준 가운데 하나로 여기지 않고, 그 많은 기준에서 가장 우선되고 다른 많은 기준을 압도하는 절대기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데서 다분히 한국적이다.

곧 직위는 한국인에게 있어 ‘one of them’이 아니라 ‘all of them’인 것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학식도 높고, 인격도 높으며, 돈도 많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으며, 직위가 높은 본인도 직위가 낮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든 다른 서열기준에서도 자기가 당연히 높다는 인식들을 하고 산다.

이처럼 직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한국인들에게 유별나다. 이를테면 고급승용차를 운전하는 기사는 그 고급승용차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 고급승용차 운전기사가 서행하는 소형차를 추월하면서 차창을 열고 그 소형차 운전기사를 향해 일갈을 하는 광경을 곧잘 보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동일시 성향의 발로인 것이다. 사장 부인은 사장의 부인일 뿐이지 회사의 서열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런 직위에 있다. 그런데도 사장 부인은 남편의 직위인 사장에다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장이 누린 권위를 사원이나 사회에 모두 누리려 한다.

한국 사람이 명품을 좋아하는 것도 바로 그 명품에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식구조 때문이라고 본다. 보다 고급 승용차를 탈수록 그 고급 승용차가 나타내주는 어떤 사회적 직위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루이뷔통의 핸드백을 들고 피에르 가르뎅의 스카프를 둘러씀으로써 그 고급 외제품이 암시하는 어떤 직위에 자신을 동일화시킨다. 비단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소위 일류대학에의 과열지망도 일류가 지닌 어떤 사회적 직위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성향의 결과라고 본다.

구한말 안동 김씨 세도는 유명했다. 심지어 김좌근, 김병국 등 세도가들이 문을 맞대고 살았던 교사동에는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뇌물의 짐수레로 꽉 찼다 한다. 빨리 바치고 돌아가야겠기에 급행료를 물어야 했고, 급행료는 그 세도가의 고지기나 집사 등 하인들이 받았다. 그러기에 '교사동 고지기 세도'란 속담이 생겼으며 '교사동 나귀와 말은 밀과와 약식도 마다고 한다'는 원한의 노래가 퍼지기까지 했다. 곧 안동 김씨 세도에 그 하인과, 나귀나 말까지 동일시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직위만 높아지면 모든 다른 지위도 아울러 높아진다는 생각은 한국인의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인 동일화성향 때문인 것이다. 한국의 윗사람은 직책상의 윗사람일 뿐 아니라 모든 사사로운 일에서까지 윗사람이기에 상사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큰일 날 일이다. 때문에 직위가 낮은 나는 모든 서열의 기준에서 상사만 못하다고 비하하고 살아야 하며, 상사보다 좋은 집, 좋은 차, 고급오락, 고급시계를 지니는 것조차 상사에 대한 불손이 된다고 생각한다.

‘앞자리에 앉은 장군의 뒤에서 재채기를 한 죄책감에 못 이겨 고민하다 죽는다.’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은 곧 한국에 있어 모든 자기의 신분을 직위의 아래에 사장시키는 그런 죽음의 풍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같은 직위지상주의의 탈피야말로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불식되어야하는 과제라고 여겨진다.

사람은 얼굴이 다른 만큼 개성과 재능과 가능성이 모두 다르다. 그 차이만큼 서열을 따질 기준도 무수히 많다. 직위지상주의의 동일시에서 깨어나 그 무한량의 수많은 기준을 부활시키는 황당한 인습체제를 과감히 절단 수술하는 그런 지성적인 용기야말로 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하는 첩경일 것이며 나아가 한국사가 요구하는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유춘택<전주시자원봉사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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