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440> 아, 씨럴 뿌려놨응깨
가루지기<440> 아, 씨럴 뿌려놨응깨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24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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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11>

앉으란 말도 없는데 덜프덕 앉으며 옹녀 년이 먼저 물었다.

"자네가 우리 영감님헌테 받은 것이 산내골 논 열마지기 문서라고 했는가?"

"그런디요?"

논문서부터 들먹이는 것이 그걸 내놓으라고 하는 수작이구나 싶어, 옹녀가 눈을 치켜 뜨며 대꾸했다.

"그 논문서 내게 돌려주게."

이천수의 마누라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멋이라고요? 논문서를 내노라고요?"

옹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풍지가 퍼르륵 떨었다. 문밖에서 섭섭이네가 킁킁 헛기침을 했다.

"이보씨요, 마님. 논문서럴 왜 내놓라고 허요? 내 뱃속으로 들어 가 똥된지 오래인 그걸 멋 땜시 내노란다요? 못 내놓겄구만요."

내킨김에 옹녀가 한 마디 더하는데, 이천수의 마누라가 주먹으로 방바닥을 쿵 내려쳤다.

"못 내논다고?"

"못 내놓지요. 못 내놓고 말고요. 그것이 어떤 것인디, 내논단 말이요.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넘의 집 손얼 이어주겄다고 내 한 몸 내놓고 받은 논문선디, 그것이 목심과도 바꾼 것인디, 어뜨케 내논다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대들자 이천수의 마누라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옹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 목심과도 같은 논문서인 줄 나도 아네. 그걸 모를 내가 아니제. 허나 자네가 할 일을 다 했는가? 논 열마지기 문서는 자네가 아들을 낳아줘야만 자네껏이 되는 것이 아닌가?"

"아덜얼 날까 못날까넌 지달려보면 알겄제요."

옹녀의 말에 이천수의 마누라가 흠칫 놀랐다.

"지달려보면 안다고?"

"아, 씨럴 뿌려놨응깨, 거그서 싹이 날랑가 안 날랑가 지달려봐야 헐 것이 아니요?"

"자네가 정녕 씨럴 받기넌 받았는가? 그 양반과 합궁을 허기는 했는가?"

이천수의 마누라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옹녀의 아랫녁을 흘끔거렸다.

"이년이 비록 남정네는 첨이었제만, 바보 천치가 아닌담에야 제 밭에 씨가 뿌려졌는가 안 뿌려졌는가 그것도 모르겄소? 글고 논문서는 내가 이 집에 가마타고 들어옴서 이미 내껏이 되었소. 이집 양반이 그랬소. 아덜만 하나 낳아주면 논 열마지기가 아니라 스무 마지기, 서른 마지기라도 준다고 했소. 아니, 나럴 안방차지럴 시킨다고 했소. 헌깨, 이미 똥 된지 오래인 논문서는 들먹이지 마씨요. 이년이 그리 호락호락헌 년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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