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
  • 이동희
  • 승인 2012.12.10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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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평등의 인권 사상이 인류 최고의 미덕이 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지구촌은 인권이 짓밟혀 신음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 된 권리, 천부의 권리를 부르짖고 있지만 만민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과 그 권리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사실 만민 평등의 실체적 감각을 느끼기에는 한참 거리가 있는 성싶다.

무엇이 만민평등인가? 권리의 무한증식을 제한하기 위해 ‘법 앞에서’라는 제한성을 두기도 하지만, 그 법이라는 것이 제정하는 의도에서부터 이를 집행하고 적용하여 제한하기까지 가해지는 의식적·무의식적 임의성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고무줄 판결이네, 정치 검찰이네, 사법살인이네 하는 법의 유린 현상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법의 편협성에 비하면 차라리 새 발의 피라 할 것이다. 그래서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정설일 성싶다.

법 앞에서 만인평등을 외치기보다는 차라리 실체적인 삶의 현상에서 평등을 찾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이를테면 수십조 원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이나, 매일 수십억을 쥐락펴락 하는 졸부나, 갓 난 증손자에게까지 수십 층 빌딩을 상속하는 늙은 수전노나 하루 세 끼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평등하다. 설사 그 한 끼의 밥값이 천문학적으로 고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설사 로마인들처럼 식탐을 즐기려고 먹고 토하고 또 토하고 먹지 않는 한 하루 세 끼면 그만이다.

만민평등이 또 있다. 사람의 수명은 누구에게나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나 신화에 장수자가 가끔 등장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수명은 기껏해야 ‘인생행락백년’이다. 철권을 휘두르는 독재자라고 해서 몇 년을 더 얹어주고, 한 나라의 최고수장이라고 해서 몇십 년을 더 살게 하며, 백만장자라 해서 수명을 무한 늘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모든 인간은 한 백 년쯤 살고나면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말라는 준엄한 평등을 심어놓았다.

이보다 조금은 약하지만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엄청난 피와 눈물을 흘려야했던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주권의 행사는 평등하다.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는 투표권마저도 확보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주권행사야말로 만민평등에 이르는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라 할 것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의해 실현되는 법치의 실현은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요 행위다. 투표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딱 한 표’다. 만약 1인 1표라는 자기결정권에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투표권을 재산의 다과에 따라 수량을 달리하거나, 권력의 위세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려주거나, 왕후장상의 종자라 해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남자나 여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도시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나,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해외에 사는 동포나 누구나 한 사람에게 투표권은 딱 한 표이다. 이런 권리가 당연한 듯싶지만 투표권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흘린 피와 땀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신성한 내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린 잔칫상이면 뭐하는가? 부뚜막에 소금이 있으면 뭐하는가? 민주주의 잔칫상에 정작 주인들이 오지 않는다면 엉뚱한 불청객들에게 자기 삶의 결정권을 도난당하는 꼴이 되며,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지 않으면 민주주의 음식 맛을 낼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머슴이 주인을 부리는 역전의 삶이 되고야 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인생에 있어서 지극한 가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Huxley. 1894~1963)의 말이다. "악한 세력에 침묵하지 말라. 침묵하는 것은 악의 편에 서는 것이다. 분연히 나설 자신이 없으면 투표라도 해라. 안 되면 벽을 보고 욕이라도 하라"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의 질타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자 기본 의무다. 강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고 회피해도 되는 권리가 아니다. ‘기권(棄權)’은 권리의 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폭력이면서 스스로에 대해 무례를 범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 행위다. 기권은 자기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꿈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만민이 평등한 한 표의 행사는 미루고 포기할 수 없는 지극히 신성한 나의 결단이다.

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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