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양병호
  • 승인 2012.07.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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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슬럼프에 빠져 있다. 매사가 심드렁하다. 특별히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도 없으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눈이 침침하다. 깊고 푸른 시를 강의하는 열정도 시들하고, 밤을 새며 낭창낭창한 시를 짓는 고뇌의 즐거움도 멀리한다. 그저 매너리즘에 빠져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통증 없이 견디고 있다. 출근하여 결재하고, 책 읽고, 인터넷 뒤적이고, 이따금 시를 읽다가, 질겅질겅 잡담도 하고, 시시껄렁한 화제에 분노한 척하다가 퇴근하여 일찍 잠든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평정심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예컨대 불혹을 지나 본의 아니게 천명을 아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를 보는 나는 곤혹스럽다. 삶이 빳빳하거나 탱탱하지 못하고 힘없이 느슨하고 헐렁한 것이다. 모든 의식과 감각은 닳고 헤져서 너덜너덜해진 것만 같다. 성찰과 반성은 생략한 채 관성의 법칙에 따라 흔들흔들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삶의 방식도 목표도 상실한 채 그저 괜시리 삶이 살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심지어 진정한 ‘나’와 대면하고 싶은 욕구도 일부러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자가진단하자면 필시 삶의 무기력증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예전의 ‘나’는 이러지 않았다. 푸르고 치열했던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고민했다. ‘나는 왜 나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언젠가는 꼭 한 번은 죽어줘야 하는가.’ 이러한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화두를 밤을 지새워 생각하고 또 고민하였다. 물론 정답은커녕 해답도 없는 이러한 물음은 열패감과 함께 음주의 기회만을 제공하였다.

그렇더라도 그때 나는 살아 있었다. 자유와 정의 같은 순수한 정신 가치를 존중하고 또 수호하려는 의지를 곧추세우곤 했다. 삶과 세상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였다. 민주와 평화 같은 공동체 의식을 앙망하고, 나아가 심사숙고하여 벼리고 벼렸다. 고뇌하고 또 번민하는 나날이 지속하였다. 경제의 평등과 공정 가치의 실현을 희구하고 꿈꾸었다. 그런 나날은 괴로우면서 즐거웠다. 불행하면서 행복했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단것만을 좋아하는 편식증에 걸렸다. 편리와 실용의 가치 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것만 같다. 잡다한 세상사에 대해 원칙과 기준이 흐릿하고 모호해졌다. 어찌 보면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아전인수의 편의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절망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아니 무관심해지고 있다. 물론 이타적 유전자도 없었겠지만 나의 안위와 편리만을 추구하는 무반성적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요즘의 나는 행복하면서 불행하다. 즐거우면서 괴롭다.

더군다나 젊어서 타기해마지 않던 물질 지향의 가치 체계가 편안하고 익숙해진 것만 같다. 맑은 정신, 순결한 영혼이라는 말을 되뇌거나 곱씹는 일이 희박해지고 말았다. 언뜻언뜻 후줄근하고 추레한 ‘나’를 조우할 때면 부끄러워 짐짓 모른 체하는 일이 잦아졌다.

또한, 몸이 늙어감에 비례하여 정신과 감각도 자동적으로 낡아가고 있다. 낡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딱딱해지다 못해 유연성과 탄력성을 잃고 있다. 시쳇말로 전형적인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 말랑말랑함과 균형감을 상실하고 편향된, 고집 센 독선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여름이고 방학이다. 태양은 작열하고 파도는 출렁이고 나무는 무성하고 바람은 불어오고 새들은 노래하는 계절이다. 세상의 만물이 의기양양 젊음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자연은 맑고 푸르고 순결한 영혼으로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느라 부산하다. 이러한 때 나는 현실과 시속을 떠나 자연 속으로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한다.

지나온 청춘의 순결하고 맑은 정신을 들깨워 허름하고 피폐한 ‘나’를 싱싱하게 피워 올려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또다시 시들고 풀죽은 ‘나’의 영혼을 빨래하여 꼰득꼰득하게 말려야 한다. 그리하여 저 맑고 푸르고 순결한 생의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되어야 한다. 펄럭펄럭.

양병호<시인/전북대 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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