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리고 인연
만남 그리고 인연
  • 이흥재
  • 승인 2012.07.05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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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숱한 만남과 헤어짐이 모두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젠가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는 9월 세계미술거장전 추진을 위한 베네수엘라 출장에서 16년 만에 만난 제자 한병진과도 이런 깊은 인연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5월 24일 오전, 대구 우손갤러리에 가기 위해 타고 가던 KTX열차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관장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 한병진입니다. 고3때 선생님 반 학생이었고요, 지금 베네수엘라 한국대사관에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5월 27일에 베네수엘라에 오신다면서요? 제가 공항에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전북도립미술관 주최의 ‘세계미술거장전’을 협의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에 갈 예정을 하고 있었지만, 결과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노심초사 많은 걱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전시관련 협약을 한다고 해도 베네수엘라 국립 현대미술관이나 정부 측의 후속 조치를 도와줄 만한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그런데 외교통상부를 통해 베네수엘라 주재 한국대사관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낸 3일 만에 받은 한병진 참사관의 전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울컥한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차창 밖 먼 산을 쳐다보았다.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한병진 참사관의 고3 담임을 맡았었다. 그는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한 후 지방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은 외무고시 공부를 하여 3년 만에 합격을 했다고 한다. 1996년 고시에 합격 후 전주에서 만난 지 16년만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꼬박 이틀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도착하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의 만남은 감격 그 자체였다.

올해 초 토정비결을 보았으면 ‘6월에 동쪽에서 귀인(貴人)이 나타나 도와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 귀인이 제자 한병진 참사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생에서 옷깃 한 번만 스쳐도 전생에 500번 이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비행기로 꼬박 2일이 걸리는 베네수엘라에서 한국대사관 참사관과 전북도립미술관장으로의 만남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은 영어선생에게서 미술관장으로 변신해 있었고, 순창 복흥면의 시골 촌놈은 전 세계를 누비며 대한민국 외교의 최전방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의 감격은 더했다.

외교관인 한병진 참사관은 첫눈에 “야 멋지다!”라는 인상을 주었다. 양복, 넥타이, 안경 등이 매우 세련돼 보였다. 몇 년 전부터 옷에 몸을 맞추지 않고, 몸에 옷을 맞추어 입는다고 했다. 일산에 있는 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입고, 와이셔츠에도 영문이름의 첫 글자를 새겨서 입고 있었다. 안경도 독일 대사관 근무 시절에 100만 원을 주고 산 안경테에 렌즈만 바꾸어 쓴다고 했다. 또 꾸준히 운동을 해서 73kg이하의 체중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디자인하는데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공사가 있는 대사관에는 참사관이 없고, 참사관이 있는 대사관에는 공사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 참사관은 대사를 도와 대사관 일을 처리하는 직책이다. 대개 편하게 소일하는 여느 참사관과 달리 한 참사관은 지금도 매일 3시간씩 논문이나 전문서적을 읽으면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인맥관리를 위한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귀국 즉시 점심 대접을 해준 베네수엘라 한국대사님께 협조해줘서 너무 고맙고, 혹시 일의 추진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 달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또 대사님께서 서울에 오시면 꼭 찾아뵙고 대접을 하겠노라는 내용과 함께, 그 이메일을 출력하여 직접 사인을 한 후 편지를 보내면 정말 고마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길 때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이제는 내가 세상살이의 방법을 제자에게서 배운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돌아온 후에도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베네수엘라 측과 문제를 조율하고 협의해나가는 일을 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 대사님, 참사관님 그리고 2등 서기관님이 도와주고 있다. 세계미술거장전 같이 큰일은 누군가가 꼭 도와줘야 성사가 될 것 같다. 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 다니엘 브리세노 서기관의 말처럼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막걸리 집에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노래 한 번 불러보지도 못하고 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인연으로 더욱 행복한 봄날들이었다.

이흥재<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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