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아직도 진행형, 결코 잊어선 안돼
6.25는 아직도 진행형, 결코 잊어선 안돼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6.06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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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낙현씨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터졌다. 그리고 3년 1개월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무려 만 3년여동안 한반도는 비극의 전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휴전협정이 맺어지면 전쟁이 다 끝나버린 줄 알아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휴전선만 그어졌지 여기저기 북한 잔당들이 활개치고 다녔어요. 전쟁이 끝났어도 사람들은 죽어나갔다니까.”

최낙현(77)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종전 1년 후인 1954년이다.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군은 전력보충을 위해 필요한 인원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여기저기서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잔족세력들은 산 속에 숨어 빨치산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6개월의 신병교육을 받고 강원도 홍천의 탄약중대에 배치 받았다. 이곳은 최전방부대에 탄약을 공급해주는 부대였다. 배치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선 남쪽에 남아있던 인민군들에 의해 탄약 6천발을 감쪽같이 도둑맞은 것이다. 난리가 났다. 적들에게 부대가 털렸으니 발칵 뒤집어졌다. 당장에 토벌대가 구성돼 사라진 적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깊은 산 속에서 준동하는 적들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풀숲에 몸을 숨겼던 적들이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친 것이다. 뭔가가 오른쪽 눈을 강타했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최 일병 저 놈 죽었네.” 그게 자신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얼마 후 동료들이 와서 건드렸다. 벌떡 일어났다. 그냥 탈탈 털고 일어났다. 아픈 것도 몰랐다. 근데 얼굴에서 이상한 느낌이 났다. 손을 대보니 피가 흥건했다. 멀쩡한 왼쪽 눈으로 오른쪽 눈에서 나는 피를 직접 본 그 순간부터 통증이 시작됐다.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때가 전쟁 중이었으면 아마 죽었을 지도 모르죠. 적들과 대치상황이었다면 쓰러진 저까지 챙길 여유가 없어 그냥 가버렸을 테니까요.”

그 후로 기나긴 투병생활이 이어졌다. 하지만 의료시설이 열악했던 군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할 순 없었다. 군 병원에 있던 1년 6개월여 동안 진통제 없인 살 수가 없었다. 오른쪽 눈에 박혔던 파편은 제대 후 6개월여가 지나 개인병원을 찾아가 제거했다. 적절한 보훈제도가 마련되지도 않았던 그 당시로서는 내 돈으로 내가 알아서 수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국가를 크게 원망하진 않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희생한 보훈가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세태에 대해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누군가는 그들의 희생을 챙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8년 전부터 매년 ‘보훈가족 초청 오찬기도회’를 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국가기관이 아닌 개인이 나서 보훈가족을 초청,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도 증정하는 것은 전국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나라도 좀 챙겨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내가 그 심정을 아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지금이야 내가 나이가 있어도 건강한 편이어서 챙긴다지만, 나중에는 누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할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잊히고 말거예요.”

김상기기자 s4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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