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개항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쳐라
일본에 개항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쳐라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6.04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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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전북의병사<2>

한말 의병투쟁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면암 최익현이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1906년 무성서원에서 시작된 병오창의는 전북지역 최초의 집단적 항일무장 투쟁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더구나 병오창의는 유림 전체를 대표하는 최익현이 맹주로 추대됨으로써 의병운동의 전국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또한 1908년 이후 전국 의병운동의 중심으로 호남이 급부상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도끼 상소

면암 최익현.
1875년 4월 조선의 문호개방과 지배를 열망하던 일본은 바닷길 측량을 구실로 운양호 등 군함 3척을 강화도에 파견했다. 또한 부산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바닷길 측량을 하면서 함포사격을 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3개월 뒤 일본은 다시 운양호를 수도 한양의 관문인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 영종진에 재차 출동시켰고, 약탈과 살상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맞서 우리 측의 수비병들도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이 바로 일본이 우리의 개항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작한 운양호 사건(강화도 사건)이다.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하고 운양호에 포격을 가한 책임을 묻겠다는 구실로 1876년 1월 8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무장병력을 강화도 갑곶에 상륙시켜 협상을 강요했다. 결국 조선은 그해 2월3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강압적으로 체결된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이 요구한 13개 조항 중 ‘최혜국대우’ 조항을 제외한 모든 조항이 포함됐고, 조선의 요구는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일본의 침략 의도대로 체결된 것이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최익현이다. 최익현은 강화도에서 조약체결을 위한 담판이 진행 중이던 1876년 1월 23일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엎드려 상소를 올린다.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 도끼를 들어 자신의 목을 치라는 시위였다.

◇최익현,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다

최익현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은 23세 되던 1855년 명경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됐다. 그의 첫 벼슬이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신창현감, 예조좌랑, 성균관 직강을 두루 역임하고 36세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됐다. 그때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국가의 존망이 위급한 시기에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국가체제를 재편성하기 위해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과중한 세금과 부역은 사회적 민폐를 조성하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최익현은 토목역사를 중지하고, 수렴정치를 금하며, 당백전을 혁파하고, 4대문 문세징수를 금할 것을 주장하는 시폐 4조의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는 당시 언관의 직책을 가진 최익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하늘을 찌른다는 대원군의 기세 앞에서 직언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상소가 구구절절 시의에 적절한 것이었기에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최익현의 이름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최익현은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돈녕부 도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곧바로 사직하고 은거했다.

1873년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됐으나, 이때도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실정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계유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대원군은 측근들을 총동원해 이 상소에 반박하고 최익현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지만, 이미 정사를 친히 다스리기로 결심한 국왕 고종은 그를 두둔해 호조참판에 임명한다. 그리고 최익현 규탄에 나선 유생과 대관들을 도리어 처벌 축출했다. 이 상소로 인해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하지만 최익현은 이 상소로 인해 부자지간을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야만 했다. 최익현은 두 차례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정치적 대변혁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그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렸다.

흑산도에 있는 면암 유허비.
1875년 2년 만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려 하자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엎드려 상소를 올리며 이를 극력 반대하게 된다.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 도끼를 들어 자신의 목을 베라는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문을 여는 강화도조약은 체결되고, 최익현은 금부에 수감됐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고 만다. 최익현의 강력한 상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본에 이어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 구미의 열강과도 통상조약을 차례로 맺고 문호를 개방하고 만다.

◇상소에서 무력 투쟁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단발령이 시행됐다. 이때 비로소 유림들이 주도하는 (구)한말 최초의 의병이 일어나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무력투쟁의 방법으로 표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당시 민간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최익현으로 하여금 의병해산을 권유할 것을 명하지만, 그는 오히려 상소문을 올려 대의를 강조하고 의병해산이 아닌 그 의기를 바탕으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 자주의 항쟁력으로 삼자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후 최익현은 의정부 찬정, 중추원 의관을 제수 받았으나 12조의 시무책을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해 조선이 전쟁터가 되자 고종은 이를 한탄하고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려 불렀으나 간곡한 상소를 올리며 이를 사양한다. 이때 궁내부 특진관과 의정부 찬정에 제수 됐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최익현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상소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그는 항시 배일의 선봉에 섰다. 그로인해 그의 거취는 곧 전국 유림의 진로를 결정하는 표적이었다. 그런 최익현이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대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게 바로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일어난 병오창의였다. 이제 일본에 대한 저항은 무력투쟁으로 본격화된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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