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대의 개념
무한대의 개념
  • 김인수
  • 승인 2012.03.08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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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이란 말은 우리가 종종 쓰고 있지만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중세 이전만 하더라도 무한의 개념은 신의 속성이라 하여 인간은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계몽주의의 도래로 인하여 이른바 신의 속성이라는 무한의 개념에 도전하므로 무한을 셀 수 있다고 주장한 칸토어는 집합의 농도 이론을 만든 후 무한의 개념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극한의 이론이 나오므로 미분 적분학과 해석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는 숫자 7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10억이란 수를 병속에 있는 모래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무한이란 양은 끝이 없다. 무한에 대한 물리적인 느낌을 얻을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방법은 자기의 집에 들어가기 위하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서 양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거울안의 거울이 결코 끝나지 않은 모습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무한이란 양은 매우 큰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작은 선분 상에서도 무한개의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임의의 두 점 사이에 있는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이용한다. 아무리 작은 선분위에도 그 두 점 사이에는 그들 사이에 있는 다른 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가운데 있는 점과 원래의 점 사이에도 또 다른 사이의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 하여 계속하므로 무한개의 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 할 수 있다.

무한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야기는 벼룩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벼룩 한 마리가 처음에는 힘 있게 뛰지만 다음에는 힘이 부족하여 처음 뛴 거리는 남아 있는 거리의 절반을 뛰는 벼룩이 있다고 설정한다. 옆에 친구 벼룩이 말하기를 만일 네가 남아있는 거리의 절반을 뛴다면 너는 결코 방을 건너갈 수 없다고 말했다. 벼룩은 그 말을 듣고 나는 이 방 끝까지 갈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래서 시합이 시작되고 벼룩은 처음에 1/2을 뛰었고, 그 다음번에는 남은 거리의 절반인 1/2 즉, 전 거리의 1/4 을 뛰었다. 벼룩은 계속 뛰었으나 항상 남아 있는 거리의 1/2 을 뛰었으니 벼룩은 그가 1/2 을 뛰어갈 거리가 남아있고 포기 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무한대의 개념은 하나의 수로는 동일시 할 수 없는 무한대의 양이지만, 매우 큰 공간뿐만 아니라 매우 적은 공간인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발견되고 또 작은 선분 안에서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개념이 왜 이리도 중요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비록 코끼리보다 작고 사자보다 용맹스럽지 못하고 독수리처럼 날지 못하고 표범보다 빠르지 못할지라도 만물의 영장의 자리에서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문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도구를 만드는 기술의 밑바탕에는 과학이란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는 것이다. 과학이란 상상력을 동원해서 세우는 학문인바. 상상력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실습장이 바로 무한이란 개념이기 때문이다.

무한에 대한 개념을 보다 철저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여기서는 참의 무한, 즉 영원한 신이 일체의 피 창조물 위에 군림한다. 이러한 관념은 중세 유럽에 깊이 침투하였다. 15세기 전반에 살았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무한을 신과 관련해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우주와 관련해서 생각하게 되어 신은 유한힌 인간이 볼 때 일체의 것이 부정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무한이고, 우주는 그 한계를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결여적 무한이라고 하였다. 18세기의 임마누엘 칸트는 무한과 유한에 관해서 그 양쪽이 함께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율배반을 제기했으나, 그의 뒤를 이은 셸링은 모든 유한의 근저에 무한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 무한을 악무한이라고 비판한 헤겔은 유한과 무한 등 모든 차별을 자기 안에 함께 포함하면서 생성과 변화 속에 자기 동일을 유지하는 절대자를 변증법의 논리로써 설명하였다.

한편 인도에서는 유럽인이 어느 단계까지 세다가 거기서부터 바로 무한으로 비약하는 데 비해, 어디까지라도 수를 세어 간다는 태도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수의 자릿수를 정하는 데에도 100을 1로 하고 1,000을 2로 하는 방법으로 40 가까이 드는 예가 있다. 인도에서 발생하고 번영한 불교도 이와 같은 생각을 수용하여 공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예를 볼 수 있다. 불교에서 특히 무한과 관계가 깊은 것은 그 근본사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연기사상일 것이다. 연기란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말하거니와, 그 관계를 무한히 확대하여 생각한다면 어떤 하나의 존재는 무수라고도 말할 수 있는 무한과 관련된 사실이 자명해진다. 이렇게 하여 유한속에 무한이 포함되므로 실은 무한히 확대되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중중무진과 같은 불교 용어는 이와 같은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유한한 인간이 유한성의 한계를 한없이 연장 확대하려는 데서 인간의 지혜에 의한, 이른바 학문이 발달하였다. 한편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유한을 초월하려고 하는 데서 종교를 낳고 무한에 대한 사상이 생겼으며,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학박사 김인수, 호남수학회장, 전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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