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길이 원칙과 손바닥 원칙
팔길이 원칙과 손바닥 원칙
  • 배승철
  • 승인 2012.02.0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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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제 그것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상투적으로 들릴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비록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는 풍토가 여전한 것이 현실이지만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이나 정치인, 일반인 모두가 문화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살찌울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일찍이 다양한 형태로 문화예술 정책을 펼쳐왔던 선진 국가들 역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문화예술 진흥을 주요정책으로 삼아왔다. 국가와 사회가 직접 나서서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일반 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촉진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살찌우도록 노력해 온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진흥 및 지원 정책도 서구 선진 국가들이 오랜 기간 동안 펼쳐온 다양한 제도적 노력과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이다. 팔길이 원칙은 공공지원 정책에서 하나를 준거하는 기준으로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공공에서 지원을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팔길이 원칙은 영국이 고안해 낸 것으로서, 1945년 예술평의회(Arts Council)를 창설하면서 예술을 정치와 관료행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하기 위해 이 원칙을 채택하였다. 팔길이 원칙의 도입은 영국 정부와 사회가 예술의 가치 즉, 사회발전에 있어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예술가 집단이 국가의 일방적 주도로 이루어지는 예술지원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이 있다는 점을 정책적으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영국은 공적 지원을 빌미로 정부가 의도하는 예술을 강요하는 관료적 간섭에서 벗어나서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팔길이 원칙을 모든 문화예술의 정책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향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공공 분야 예술지원이나 문화예술기관 운영을 언급할 때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원칙도 팔길이 원칙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문화예술을 포함한 모든 공공 영역에서 이러한 원칙이 실질적으로 지켜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니, 오히려 팔길이 원칙은 하나의 지향점일 뿐 여전히 우리 사회의 문화예술 지원정책은 관료 위주의 통제적 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팔길이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간 영역을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할 수 있는 신뢰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민간의 전문적인 역량이 십분 발휘될 수 있는 한에서만 행·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없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맡겨야 하듯이, 전문적인 민간 영역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행정당국의 손길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공공문화예술 기관에 대한 지원이나 특정 문화예술 관련 사업을 수행할 때에도 민간 영역 스스로 자신들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와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반면, 팔길이 원칙의 구현을 위해서는 민간 영역의 전문적 공정성과 합리성이 관(官)의 마인드 변화와 의지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흔히 공공 문화예술정책에서 관의 무능함이나 효율적이지 않은 구조만 탓하고 민간영역이 갖추어야 할 책임성이나 개선해 나가야 할 운영구조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행정의 경직성만 개선한다고 문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닌데 마치 모든 문제가 행정의 비전문성과 경직성에만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민간의 자율성이 담보되고 정당한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민간영역 역시 그에 상응하는 합리성도 같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결국 지원주체(관)와 지원대상(민간) 모두의 역할과 책임이 균등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팔길이 원칙에 담겨있는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제도적 개선과 실천을 통해 민간의 문화예술 영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고, 민간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그 과정과 결과물에 분명한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맡겨봤자 별거 있겠나’, ‘제대로 지원할 턱이 없지’ 등 볼멘소리를 하며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만 높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결국에는 팔길이 원칙이 아니라 손바닥 원칙(pam's length principle)의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배승철<전북도의회 문화관광건설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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