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재 이석용 의병장
(4) 정재 이석용 의병장
  • 김상기기자
  • 승인 2011.10.31 1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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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의 의사 이석용은 역사적 조국광복의 대의를 밝혀 천리 밖에 있는 일본의 천황이란 그대에게 말하노니 잘 들어보아라. 목인(睦仁, 일왕 이름)아! 너는 대한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나 이석용이 있느니라. 나는 천하에 대의를 밝혀 피로써 기어코 원수를 갚고, 그대의 눈을 빼고야 말 것이며, 그대의 살을 씹고 그대의 가죽을 벗겨 그것으로 내 방석을 만들고야 말 것이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이 1911년 4월, 일왕에게 보낸 글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말 의병을 이끌다 일제에 사형을 언도받고 3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짧은 생을 조국과 민족에 바친 이석용 의병장.

이석용 의병장 생가

1878년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그의  호는 정재이며, 의병투쟁 때는 ‘이학사’로 불렸다.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아 7~8세에 유가의 경전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서에 이미 통달할 정도로 명민했다.

1906년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병오창의에 참여했으나, 최익현의 해산명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력에 의한 의병활동을 결심한다. 그해 가을부터 이석용은 1년여 동안 거사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전주, 임실, 장수, 진안, 남원, 순창, 곡성, 거창, 함양 등지를 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정부를 비롯해 일본정부 앞으로도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 건의문, 호소문 등을 돌렸다. 그러다 1907년 일본과 친일 대신들이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7조약을 체결, 조선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아 모든 정책결정에 관여하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거의를 서둘렀다.

△마이산서 호남의병창의 동맹단 결성
 마침내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바위 앞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했다. 이때 제단을 중심으로 고천제를 가진 의병들은 환호성을 올리면서 이석용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그는 한때  5백여명여 달하는 의병을 이끌기도 했지만  때론 3백여명,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를 때는 10여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맞섰다. 부적하는 자를 응징 또는 개과천선케 하고, 백성들의 적개심을 일깨우며, 민폐를 극소화해 백성을 위무했다. 그는 엄한 군율과 무기개조, 군복을 염색해 입는 등의 지혜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군기를 엄하게 해 덕망을 모았고, 부대편성에 있어서도 반상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천민시하던 무당출신을 초장에 임명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호남의병창의동맹지

전북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 군경과 행정기관이 총동원됐다. 많은 현상금을 내걸었고, 임실에 있던 그의 집은 물론이고, 장수에 살던 여동생의 집을 불태우고, 여동생과 매부 가족을 오수수비대로 끌고 가 온갖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석용의 의병은 일본 군경과 5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적을 살상했다.

1908년 10월 일본은 마침내 1만여에 달하는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편성,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1차, 2차, 3차를 정하고 의병에 대한 포위공격을 감행하니 몇백명에 불과한 수와 열악한 무기를 가진 의병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다. 그는 투쟁을 계속하다가는 의병의 아까운 목숨만 희생될 뿐이라 판단, 1909년 3월 6일 자기 예하의 의병들에게 해산을 명한다.

△밀고로 붙잡혀 36세에 순국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끝내 순종황제를 폐위하고,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에 이석용은 1911년 3월 옛 동지를 모아 비밀조직을 만들어 동경으로 가 일왕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 경찰과 헌병의 경계망과 추적으로 국내 투쟁이 불가능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1913년 망명 자금 모금을 위해 고향 친구를 찾았다가 밀고로 잡히고 만다. 그리고 1914년 4월 4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했다. 

황극단

이후 이석용 의병장의 아들인 이원영은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사재를 털어 전주에 황극단을 세우고, 1957년에 고향 성수면에 소충사를 건립해 부친을 비롯한 28의사를 배향했다. 그러다 소충사는 장소의 협소로 오봉리에 새 터를 마련하고 오늘날처럼 성역화가 추진됐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그의 순국정신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해마다 10월 초순이면 임실에서는 소충사선문화제가 열린다. 이 때문인지 기자가 방문한 10월 1일 소충사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하지만, 거기 머문 2시간여 동안 단 한사람의 방문객도 만날 수 없었다. 인근에 있는 이석용 생가에도 들려봤다. 역시 깨끗하게 벌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싸리문마저 굳게 잠겨 있었다.

분기탱천하는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한 마이산 용바위는 또 어떤가. 당시 일본인들은 의병들이 집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의병의 기세가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잡초가 무성해 접근조차 힘든 곳이 되고 말았다.

나라가 일제에 넘어가는 누란의 위기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의병장들과 이름없는 의병들의 역사적 현장은  대부분 사라지거나 방치된 사례가 허다하다. 이석용 의병장을  추모하는  소충사가 건립되고 생가까지 복원됐으니 대접을 받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인 한말 의병사가 마치 전설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들을 기리는 후손들의  자세를 되돌아 보게 한다.

김상기기자 s4071@

최성미 임실문화원장
정재 이석용은 17세인 1894년 부령 김씨에 장가들었다. 그해 동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일제침략이 시작되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이석용은 당대의 석학들을 두루 찾으며 구국의 방책을 묻는다.

28세가 되던 1905년 마침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서울에 모여 조약 철폐를 주장했으나 무력으로 진압된다. 이석용도 이때 상경해 미국공사에게 서한을 보내고 일제침략을 통렬히 규탄했지만,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울 대책이 없었다.

이에 의병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던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이석용은 마침내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올린 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집을 떠났다.

이석용은 전기홍 의병장과 더불어 호남 의병의 두 거성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말 일제 침략기에는 필히 호남의 자력과 인력 없이는 국난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고 하니 호남 의병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연원이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석용은 29세란 젊은 나이에 의병장이 되고 수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일제의 토벌작전에 못 이겨 일단 의병을 해산했으나, 이 후 다시는 의병을 규합하지 못했다.

그러다 임자년(1912) 겨울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을 결성해 광복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됐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때 나이 겨우 36세였다.

지금도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가 배향된 소충사에서는 해마다 군민의 날에 그들의 정신을 추모하는 제례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성수면과 임실군의 상징이며, 성수면에서 태어났음은 면민들의 자랑이요 임실군민들의 자랑으로, 군민모두에게 자긍심을 높이 심어주신 분이다.

-최성미 임실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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