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6.25 모른다고 하면 서운해”
“젊은이들 6.25 모른다고 하면 서운해”
  • 김상기
  • 승인 2011.06.0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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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방상권씨 현충일 맞이
“인민군들 총소리는 ‘따꽁’하는 소리가 나는데, 낮에 그 소리가 들리면 또 누가 한 명 죽었구나 하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 전까지 남과 북은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은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들로 가득했고, 매일같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격이 빨랐던 동부전선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진지를 고수하며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하는 적도 중공군이 아닌 인민군이 대부분이었다.

“서부나 중부전선처럼 우리는 전면전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히 쉴 수 있었던 것도 아녀. 낮에 밖으로 조금만 나다니면 금세 저쪽에서 총탄이 날라 와. 밤에 수색 나갔다 인민군 만나면 싸우다 죽고, 지뢰 밟아 죽고, 경비서다 잠자면 수색 나온 인민군 총에 맞아 죽기도 했어. 다행히 우리 부대원들은 많이 죽지는 않았지만, 한 시도 죽음의 그림자가 걷힌 적이 없었다니까.”

21사단 66연대 3대대 본부중대에서 근무한 참전용사 박상권(81)씨. 그는 1952년 10월 20일 군에 입대, 제주도에서 기초훈련을 받았다. 원래 96일을 받아야 했지만, 전선의 시급함으로 교육도중 강원도로 올라간다. 양양에서 대기하며 4~5개월 추가 훈련을 받고, 이후 고성 최전선에 배치된다.

한탄강을 사이에 둔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낮에는 참호를 파고 숨어 지내다가, 밤이면 수색에 나섰다. 인민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수색의 목적은 한탄강을 몰래 건너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위치를 알면 곧바로 포격이 시작된다. 그러다 들키면 교전이 벌어지고, 동료들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5년 가까운 군 생활을 하고 1957년 제대했다. 하지만 참전용사로 인정된 건 44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6.25 전쟁에 참여하면 참전용사로 분류되고,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준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같이 참전했던 친구가 알려줘 뒤늦게서야 신청할 수 있었다.

“예전에 군대갔다 왔다고 하면 인정해줬까니. 그때도 똑똑하고 빽있는 놈들은 군대 안가고 다들 도망다녔어. 그러다 제대하면 뭘하겠어. 국가에서는 신경도 안써주고, 배운 것도 빽도 없고. 그래서 다들 고생이 많았어. 지금은 이런 저런 혜택도 주고 참 많이 좋아졌지. 나야 뒤늦게나마 이런 대접을 받지만, 고생만 죽어라고 하고 그냥 간 사람들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

박씨는 사단장 특명으로 제대하기 몇 달 전 하사로 진급했다. 하지만 10년 전 참전용사로 등록할 때 병적증명서를 떼보니 병장으로 나와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때 자료가 육군본부로 안 올라가고 중간에 누락된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땐 그런 세상이었다니까. 이게 내 팔짜인가보다 하고 살다 간 사람이 많았어.”

현충일을 맞은 박씨는 지금 정부가 고맙기도 하지만, 서운한 점도 많단다.

“젊은 사람들이 6.25가 뭔지 모른다고 하면 서운한 생각이 들데. 어떤 사람은 우리가 북침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게 다 정부가 교육을 제대로 못시켜서 그런거여.”

그는 “6.25때 학도병으로 나갔던 후배들도 벌써 70대 중반이 넘었어. 그 사람들 지금 한 달이면 몇 명씩 세상을 떠나. 얼마 남지도 않은 사람들 너무 서운하게 하면 못쓰지. 조국을 위한 귀중한 생명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이 갈수록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상기기자 s4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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