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무질서, 깨진 유리창
새벽 무질서, 깨진 유리창
  • 유길종
  • 승인 2010.12.0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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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거의 매일 새벽운동을 한다. 아파트 건너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걷거나 뛴다. 아파트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려면 신호등이 설치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날이 일찍 밝는 여름에도, 6시가 되어도 여전히 어두운 겨울에도 새벽 시간에는 차량이 뜸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사시사철 변함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새벽 시간에 그 길을 지나는 차량들이나 길을 건너는 행인들 모두 신호등은 그다지 안중에 없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필자는 신호에 따라 정지하는 차량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보행자 진행신호가 들어와 있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있음에도 사람을 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듯 신호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차량들이 대부분이다. 눈을 흘겨보지만 신호등도 안중에 없는 분들이 필자의 작은 눈을 개의할 리가 없다. 신호를 무시하는 것은 차량들만이 아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분들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멀뚱히 서있기 민망하다.

왜 아직도 이럴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얼른 생각나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고 계도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공권력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단속만큼 교통질서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1988. 7. 15.자 동아일보 11면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실시된 교통단속의 결과 교통질서가 현저히 개선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도심의 자동차운행속도는 시속 19킬로미터에서 26㎞까지 높아졌고, 교통사고는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제재가 강한 예방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나 이론을 떠나 경험상 명백하다. 카메라에 찍혔으니 범칙금을 납부하라는 통고서를 받은 것보다는 현장에서 적발되어 스티커를 발부받았을 때 후회의 심정이 더했던 것 같다. 필자도 10여년 전 황색등에 진입하다 현장에서 단속된 쓰린 경험을 한 이후 황색등으로 바뀌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진입하는 짓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교통법규 위반을 단속하는 경찰을 보기 힘들다. 시내에서 신호위반 등을 단속하는 경찰을 본 적이 별로 없고, 고속도로에서도 과속단속을 하는 경찰을 본 적이 없다. 경찰은 기계가 여전히 단속을 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계가 하는 단속은 여러 모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동차전용도로를 달리다 예상 못한 지점에서 과속을 단속하는 경찰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우리 경찰은 현장 단속은 포기하고 기계에게 단속을 일임하고 있는 형국인 것 같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교통질서 수준을 감안하면 단속에 소극적인 경찰의 태도는 직무유기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경찰의 소극적인 단속을 탓하기 이전에 시민들의 의식이나 습관이 더 문제일 것이다. 새벽녘의 무질서를 보고 있으면 얼마 전 TV에서 본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s Theory)이 생각난다. 위 법칙은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3월에 발표한 사회 무질서에 관한 이론이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 건물을 관리가 포기된 건물로 판단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조리 깨뜨리게 되고, 나아가 그 건물에서는 절도나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가 일어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즉,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법칙 내지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뉴욕 시의 치안 대책에 적용되어 효과를 보았다 한다. 1980년대 뉴욕은 연간 60만 건 이상의 중범죄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치안이 엉망이었고, 특히 뉴욕의 지하철은 흉악범죄의 온상이었는데, 뉴욕 지하철의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적용하여 낙서를 청소하였다는 것이다. 지하철의 낙서 지우기 프로젝트를 개시한 지 5년이 지난 1998년 드디어 모든 낙서 지우기가 완료되었는데, 그 결과 뉴욕의 지하철에서의 범죄는 75%나 급감했다는 것이다. 뉴욕시는 지하철에서 성과를 올린 범죄억제대책을 다른 부분에도 도입하여 보행자의 신호위반 등 경범죄의 단속을 철저하게 계속하였고, 그 결과 범죄 발생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한다.

차량도 뜸하고 인적도 없는 길에서 신호를 지키고 있는 것이 쓸 데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고, 그렇게 한가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호를 무시한 나의 행동 하나가 깨진 유리창처럼 강력범죄를 유발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면, 새벽길에 신호에 따라 멀뚱히 있는 것은 나 자신, 나아가 내가 사는 곳을 범죄로부터 막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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