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여성이 일반적으로 수학을 잘하지 못하며 싫어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편견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은 본래 수학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에서 멀어지도록 사회적으로 길들여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학을 잘하는 여성에 대한 원초적 금기 반응은 인류 최초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의 비극적 최후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히파티아는 이집트의 도시국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자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를 도와 고대 천문학을 집대성한 알마게스트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다. 또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개정하고 디오판토스의 산학·아폴로니오스의 원추 곡선론에 관한 책도 집필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400년경 알렉산드리아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 학자였던 그녀는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의 주위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당시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도들은 히파티아의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자유분방한 그녀의 행실을 이교도적이며 기독교에 대해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기독교도들은 여성이 수학을 잘하는 것을 마녀라고 간주했으며 남성 추종자들이 유난히 많았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학 사가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로스 및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오레스테스와 가까게 지냈던 것이 그녀의 운명을 재촉했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 수학자이자 소설가인 드니 게디는 몇해 전 발간한 수학역사소설 앵무새의 정리에서 415년의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이 길을 지나던 그녀의 마차로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가벗긴 채 성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깎은 굴 껍데기로 그녀를 고문한 뒤 산 채로 불태워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해서 히파티아의 모든 저작은 소실됐으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이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파티아는 역사에서 잊혀 졌으며 생애의 많은 부분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불운했지만 극적인 그녀의 인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히파티아가 죽은 뒤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점차 상실해갔으며, 이는 곧 고대 과학의 전반적 쇠퇴로 이어졌다. 여성은 수학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지극히 비상식적인 편견을 우리가 갖게 된 바탕에는 인류 최초의 여성 수학자의 비극적 최후 이야기가 깔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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