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수 진안우체국장> 의식적 자각 하에 본 영화 ‘방자전’
<이승수 진안우체국장> 의식적 자각 하에 본 영화 ‘방자전’
  • 권동원
  • 승인 2010.07.0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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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자 전’이 인기다. ‘상당히 야하고 은근히 웃긴다.’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명대사 모음을 보면 “양반의 여자가 아니라 원래 제 여자예요.”란 말에 많은 표가 몰리고 있다. 방자의 의사에 동조하겠다는 뜻인데,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방자를 앞세워 춘향전을 재구성하면서 에로를 넣고 익살로 비빈 색다른 맛에 사람들이 취했다. 까칠한 네러티브 라니, 각본을 쓰고 감독도 하고, 시대를 넘나들며 사랑을 재단한 김대우 감독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사극 비틀기의 명수라는데…….

그는 지금 음란서생보다 훨씬 토실토실한 작품이라며 웅성대는 저잣거리 사람들을 흐뭇함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극장 간판에 걸린 방자의 해어진 옷고름을 보면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핍진성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사랑과 신분 모든 것을 가지려 했던 여인 춘향, 하찮은 사랑놀음에 하 세월 할 위인이 아니라면서도 바로 그 사랑에 빠지고 마는 이몽룡, 한번 사랑에 빠진 후 아예 헤어나지를 못하는 방자, 영화는 이 세 사람 사이를 교묘히 뚫고 다니며 광상곡을 만들어낸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스토리텔링의 위력 있는 파장이 오랜 세월 원전을 신봉해온 우리 사회에 얼얼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설정부터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라고 단정하지 말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주의를 기울였으면 한다.

영화치료에 ‘의식적 자각화’(시네마 세라 피, 비르기트볼츠 저)라는 감상법이 있다. 즉 ‘우리의 주의는 지각할 때마다 바뀌고, 이는 우리가 세상과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대개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하는 전제’ 하에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정절의 상징으로 알았던 춘향이가 양다리를 걸쳤다. 한갓 몸종에 불과한 방자가 주인 이몽룡과 연적이 된다. 많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 벼슬을 하겠다는 변학도, 이몽룡 집에서 빵을 해결하는 식객 주제에 성교육 강사로 분하는 마노인, 춘향보다 자기가 성적 매력이 많다고 주장하는 향단, 모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들은 뚜렷한 목표가 있다. 이몽룡은 출세욕 앞에서 사랑을 수단으로 삼는다. 조작된 암행어사 출두를 보면 안다. 춘향이 시도하는 사랑과 신분상승이란 두 마리 토끼몰이는 우선순위도 완급도 없이 오직 목표만을 향해 치닫는다.

인기 작가(공형진 분)에게 자신의 순애보를 양반(이몽룡) 중심의 이야기로 꾸며달라고 부탁하는 방자에게서는 춘향을 끝까지 챙기고 싶은 연민을 본다.

마 노인은 어떤 형태로든 밥값을 해야 하고, 방자에게 버림받은 향단은 주막을 차려 부를 축적함으로써 자신을 챙긴다. 혀 짧은 대사로 사람을 웃기는 변학도야말로 이 영화에서도 어쩔 수 없는 들러리다.

저자는 의식적 자각화 하에 영화를 감상하는 데 있어 ‘무비판적인 태도로 주의를 집중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현재의 경험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닐 때 그 수준을 높일 수 있다’라고 부연한다.

‘탈무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반영’이다. 라는……. 좌충우돌하다 끝나는 것 같지만, 영화는 인권에 대한 배려와 인정의 소중함도 완곡하게 갈파한다.

이몽룡은 방자의 가소로운 사랑의 행보를 실력으로 제지하려 들지 않고, 월매나 춘향 역시 향단을 힘으로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마 노인이 방자에게 해주는 족집게 과외는 공짜다.

방자의 이야기를 집필 중인 작가의 색안경은 어디를 보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 보이는가? 영화는 객석을 향하고 있는데, 사람은 자신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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