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리산숲길
(12) 지리산숲길
  • 하대성
  • 승인 2010.02.0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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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침, 천년세월 날보라 하네
겨울 지리산은 더웠다. 기후변화 탓인가, 설레임 때문인가. 우리 민족의 자양분인 지리산. 수많은 전설과 민족신앙, 호국정신을 낳았던 뜨거운 탯자리라서 그런 것 같다. 아직도 아픈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마한시대의 전투, 고려 말기의 왜구침입, 임진왜란 때의 수난, 동학농민전쟁, 항일의병활동, 여순반란, 6·25전쟁……. 부침과 질곡이 함축된 현장이다. 지난달 29, 30일 어머니 산인 지리산을 디뎠다. 운봉-인월쪽을 택했다. 길을 걸으며, 내를 건너며 지리산을 감상하는 부드러운 코스. 어느 마을이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나를 지탱해주었고/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의 <옛날의 그 집>이다. 편안하다. 박경리 말대로 늙어서 편안한 것은 아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맘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자질구레한 일상을 훌훌 털고 길을 걸으면 모두가 홀가분할 것을. 삶은 비우기 못해 무겁고, 채우지 못해 불편하다.



320㎞ 코스 33일 걸어야 한 바퀴



지리산숲길은 총 320㎞다. 3개 도(전북,전남,경남),5개 시군(남원,함양,산청,하동,구례),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친다.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232시간(시속 1.3㎞)쯤 걸린다. 하루 10㎞씩 걸으면 대략 33일, 한달넘게 소요된다. 2008년 4월 시범구간 21㎞(남원 산내 매동마을-함양 휴천 세동마을)가 첫선을 보인 이래로 2010년 2월 현재 주천~운봉, 운봉~인월, 인월~금계, 금계~동강, 동강~수철 등 5개 구간이 만들어졌다. 2011년이 돼야 모두 열리게 된다.

남원 운봉-인월구간은 너른 운봉들녘과 손잡고, 지리산 서북능선·백두대간과 소곤대며 터벅터벅 걷는 길이다. 9.4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다. 폭이 넓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다. 부드럽고 유순한 마을 인월에 지리산숲길안내센터가 있다. 구길본 북부지방산림청장이 강원도 약수숲길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지리산숲길과는 인연이 깊다. 초기 시범구간을 만들때 이곳에서 근무했다. 길내기 노하우를 배우려고 왔다.” 구인월교쪽으로 가는 길은 마을길이다. 땔감 구하려 나섰다는 김점돌(90·인월마을)씨. 손수레에 팔뚝만한 톱을 싣고 벙거지를 눌러 쓴 김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정정해 보였다. “집사람이 아파서 정읍 딸네집 근처 병원에 입원했어. 혼자 사는 게 무료해서 가끔 바람도 쐬고, 땔감도 구하려 나가지.” 그는 밥은 짓고 반찬은 면사무소에서 주는 것으로 식사한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어딜 가시는 중이에요?" "저기로 파 좀 사로가" 안영순(71·인월마을)씨가 돈 3천원과 바구니를 들고 이웃사람처럼 말대꾸하고 지나갔다. 왼쪽으로 구인월교를 건너면 월평이다. 마을 터가 동쪽을 향해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月坪)이라 했다. 지금으로 달오름 마을이란 애칭도 가지고 있다. 기존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지만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회사원,공무원,사업가들이 많다. 주민들의 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은 마을이다. 이성계가 달을 끌어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영월정이 세워 매년 인월제(引月祭)를 지내고 있다. 정옥금(86·월평마을)씨는 60년전 인월 동래동에서 질마재와 오리정을 넘어 이곳으로 이사 왔다. 얼굴에 검버섯은 많았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밝았다. “우리 동네는 외부에서 사람들이 자꾸 들어와 사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박수옥(65·월평마을)이장은 “오늘도 부산에서 한 분이 이사 온다. 귀농학교를 거쳐 귀향했다. 지난번에도 부산에서 왔는데 또 왔다. 우리 동네는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아 집값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젊은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길은 마을 뒷산을 거쳐 흥부골자연휴양림으로 연결된다. 고사리밭과 과수원이 곳곳에 있다.

임도 초입에 막 들어서자 청년 3명이 등장했다. 충남 홍성에서 온 초, 중학교 동창생들로 고3 예비대학생들이다. 한현욱(20)씨는 민원을 먼저 제기했다. “화장실이 3군데 있는데,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주막이 있었으면 좋겠다. 휴식도 취하고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3총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월평쪽으로 향했다.



어깨동무 한 황산대첩과 판소리

“송홧가루 날리며/고이 맺은 귀한 열매/거친 터전 위에 미래를 묻어두고

눈보라 휘몰아쳐/심장은 얼붙어도/가지마다 겹겹이/소망을 안고/인고의 밤을 지새우며/꿈을 이루어가는/겨울 소나무.

천년 세월 청청/나를 보라 하네.” 김두영 시인의 <겨울 소나무>이다. 임도 3㎞주변 산은 소나무도 많다. 아름드리는 아니지만 걸쭉 걸쭉하다. 바람결에 눈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몇 굽이를 돌아치면 옥계호가 왼쪽 시야에 들어온다. 물은 얼어붙었다. 댐길은 커다란 자물통을 매달고 철문이 지키고 있다. 바로 아래는 대덕리조트. 북적대던 여름철의 흔적은 어디로 가고 너무 한가해 을씨년스럽다. 화수교를 건너면 군화동. 1961년 운봉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화수리 이재민들을 위해 군인들이 새로 13호 마을을 만들었다 해서 이름이 군화동(軍花洞)이다. 마을 초입 느티나무 아래에 집을 진 오장군의 비가 옛스럽게 서있다. 임옥순(76·군화동마을)씨는 그때의 물난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 저녁 7시께 둑방물이 넘쳐 마을로 덮쳤다. 주민들은 부랴부랴 몸만 당산으로 피했다. 주민 14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마을 조성 당시 만든 우물이 고풍스럽다. 사방으로 석축하고 양철지붕에 사각몸통이다. 지금도 물이 많고 맑아 김장 등 행사 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비전마을로 통하는 길목에 국악의 성지 대형 안내도가 반긴다. 국악의 성지는 황산에 자리한다. 황산대첩비의 황산이 바로 여기다. 국악의 성지는 국악전시체험관, 국악산인묘역,사당 등이 있다.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음악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종합예술공간이다. 사계절 내내 황산과 어우러지는 멋스런 조경 또한 일품이다. 김병수(70·비전마을)씨는 “비전마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이성계와 판소리로 유명하다. 해마다 많은 사람이 몰린다. 황산대첩비와 가왕,국창 생가를 찾는다. 마을 앞에 황산대첩비각이 있다하여 비전(碑殿)이라 불리고 있다.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이 관리했고, 그 식솔들이 모여 살기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을 서편에는 하마정이 있어 주변의 주막의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맹열아 맹열아 잘 가거라



“맹열아 잘 가거라 맹열아 맹열아/네가 가면 정 마저 가져가지/몸은 가고 정만 남으니/ 쓸쓸한 빈 방안에/외로이 애를 태우니 병 안될소냐/맹열아 잘가거라” 가왕(歌王) 송흥록과 국창(國唱) 박초월 생가가 가까워 지자 <흥타령>이 은은하게 울렸다. 송흥록(宋興祿)은 1780년경 이곳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송첨지는 명창 권삼득의 수행 고수였다. 송흥록은 소리에 천부적인 재질을 가져 성량이 풍부했다. 한 두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무보살(歌舞菩薩)의 시현(示現)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동편제 창법의 창시자인 송홍록은 중국의 시중천자(詩中天子)이태백에 비유하기도 한다. 모든 판소리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남원에서 출생한 박초월(1917-1983)은 김정문,송만갑에게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등을 배웠다.1930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김희윤(70·비전마을)이장은 "박초월 친조카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다. 송흥록 생가의 우물물을 어릴 적에 두레박으로 떠 마셨다.”고 당시를 회생했다. 생가 바로 옆은 황산대첩비지이다. 골프 칠 수 있을 정도로 잔디가 잘 조성돼 있다. 넓은 것이 프로축구장을 연상케 했다. 고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왜구가 남원을 공격해 오자 이성계가 토벌에 나섰다. 고려말 우왕 6년(1380년)운봉읍 화수리 화산 일대에서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이성계가 섬멸했다. 이 싸움을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한다. 최영장군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더불어 고려시대 왜구와 싸워 승리한 2대 대첩이다. 왕명으로 세워진 비문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아 글씨를 읽지 못하게 하고 비신을 파괴했다. 1977에 비각을 세워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했다. 대첩비 옆 50미터 쯤 가면 바위 한쪽을 기둥 대신으로 삼은 어휘각이 있다. 대첩 1년 후 이곳을 다시 찾은 이성계가 황산대첩의 승리를 기리고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넣었다. 일제는 이것도 정으로 쪼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오늘날까지도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에 얽힌 지명이 많다. 중군이 주둔했던 중군(中軍)마을, 황산대첩때 군량미 창고를 두었다는 사창(社創)리, 왜군 장수 아지발도의 피가 뿌려졌다는 피바위. 인월(引月)이란 지명도 이성계가 달빛을 끌어다 활을 당겨 밤까지 싸워 이겼다는 전설이 담겨있다. 또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여 인풍(引風)이라는 지명도 있다.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다. 주변에서 화살촉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황산대첩비 길목에는 노송숲이 우거져 있다. 부인과 함께 지리산숲길에 온 박세정(56) 대구계명대 교수. “걷는 길 표시가 독특하다.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있다. 빨간,검정 색으로 방향을 표시한 것이나, 깜찍한 솔방울 아이콘, 재질을 나무로 친환경적이어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전라도 사람들이 지역 경쟁력 개발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고창 청보리축제,함평 나비축제 등 지역 차별화 전략이 대단하다.” 박교수의 전공은 행정학이라 남다른 분석을 했다. “아니 저건 뭐죠”“황산대첩비입니다.” 이성계 이야기를 풀어놓자 박교수 부부는 귀를 세웠다. 길손들에게 지역 역사, 문화를 설명할 길해설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청동오리가 그리는 물길 동심원



코스은 대첩교를 건너 다시 둑방길이다. 서걱대는 갈대밭, 질퍽거리는 흙길을 지나고 물길과 발을 맞추다 보면 신기마을에 이른다. 운봉의 구내면 지역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터 또는 신기(新基)라 했다. 낙동강 상류인 람천이 마을 앞을 흐르는 성산(城山:잿뫼산) 아랫마을이다. 성산은 신라의 국경 요새였다. 마을주민들은 소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옛부터 비보토성(裨補土城)을 쌓아왔다. 김동섭(69·신기마을)씨는 풍수가다. 신기마을에 대한 역사를 줄줄 꿰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술술 나왔다. 마치 녹음기를 튼 것 같았다. “44년간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가 바로 마을 역사이다. 지금도 읽어보면 재미난 얘기가 많다. 동네 2곳에 고려장터가 있고 토성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장 석실은 1900년대에 도굴당했다.” 그는 토성 흔적을 사진 찍으라며 안내했다. 마을에 불이 많이 나 화기(火氣)를 빼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호수가 밤 되어/온통 얼음으로 얽혔는데/청둥오리 한마리,붉은 물갈퀴로/물 낯바닥을 밤새워 할퀴어/제자리만 빙 얼지 않았네

산천도 잠들고/호수도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청둥오리가 호수의 숨결/여태 깨우고 있었네

아마 푸드윽 정갈한 생명 하나/푸른 하늘로 솟을 것이네” 소재호 시인의 <청둥오리>이다. 신기마을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에 청둥오리떼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어른 주먹만하다.13마리가 부지런하게 자맥질한다. 고요한 물길에 동심을 그으며.

지도에서 본 서림공원 모습과 실제는 달랐다. 지도는 세 개 산봉우리가 표시돼 제법 우거진 숲으로 보였다. 길손을 먼저 맞이한 것은 돌장승이다. 운봉은 돌장승의 땅이라 했나보다. 남원에 있는 돌장승 16기 중 15기가 이곳에 있다. 재미 난 표정의 장승이 2개 있다.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다. 얼굴 표정이 아리송하고 마뜩하다. 이들은 80년에 도난당한 적이 있다. 그때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입구에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오래된 박봉양 비가 눈길을 끈다. 운봉의 부유한 향리였던 박봉양은 1894년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이 운봉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어했다. 그 후 구한말 항일투사로 나섰고 운봉지역 근대 학교인 사립운동만성학교(현 운봉초등학교)를 설립했다.



길은 내 마음속으로 이어지고…



남원 운봉 땅을 적시며 흘러온 람천. 아영쪽에서 흘러온 풍천과 인월에서 만나 몸을 섞는다. 지리산 달궁 계곡과 뱀사골 계곡의 맑은 물을 더해서 얻은 이름이 만수천이다. 만수천은 실상사를 돌아내려 마천을 지나 백무동 계곡과 한신 계곡의 물이 더해진다. 벽송사 아래를 흐르면서 칠선계곡의 물이 보태지면 엄천강이 된다. 엄천강은 더 흘러내려 경호강으로 이름표를 바뀌어 달았다가 진주 진양호를 지나면서 남강으로 합해진다. 마지막으로 낙동강에 몸을 의지하여 부산 앞바다로 흘러들게 된다. 이곳 운봉에서 부산으로 람천은 흐른다.

김경용(59·운봉 동천)씨는 개인택시를 남원에서 몰고 있다. “운봉에는 택시가 3대 있다. 주말이면 길손들이 많아 수입이 늘었다는 말을 들었다. 지리산의 덕이다. 지리산길이 다 열리면 더 많은 사람이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발길은 예서 끝났다. ‘하지만 길은 끝이 없다. 그 길은 어느새 내 몸과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지리산 시인으로 유명한 이원규의 <지리산편지>가 생각났다.

기획특집팀=양준천·하대성 기자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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