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수 뜬봉샘 가는 길
(11) 장수 뜬봉샘 가는 길
  • 하대성
  • 승인 2010.01.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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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천리물길 '봉황 전설속으로'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시<새로운 길>전문이다. 윤동주가 노래한 <새로운 길>은 그가 자란 간도의 길일까, 용정의 길일까. 아니면 유토피아로 통하는 마음의 길일까. 숲속의 좁은 길, 갈대가 풍성한 강둑길,내를 건너 마을로 통하는 성황당 돌무지 길…. 만나는 길은 늘 새롭다.어제의 길은 오늘의 길이 아니듯, 환경에 따라,마음상태에 따라 길은 달라진다. 그래서 길은 새롭다. 지난 22·23일 걸은 장수 둘레길, 노하숲에서 뜬봉샘으로 가는 길(12.6㎞)은 편했다. 길손은 별로 없어 사람 만나기는 힘든 길이었다.



“숲은 세상으로 통한다/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밝은/삶처럼 팍팍하다/숲길 또한 이와 같아/막힐 때와 뚫릴 때가 있다/오르막과 내리막길/입구와 출구가 불분명한/숲길을 더듬어 간다/대낮인데도 어둡다/그럴 때마다,잠이 든다/때로는 고요 속에/때로는 폭풍 속에/우우,살아나기도 한다/있다고 있는 것이 아닌/없다고 없는 것이 아닌/숲은 우주로 통한다” 주봉구 시인의 <숲길을 가다>이다. 장수 노하숲은 잠들어 있었다.눈으로 만든 홑이불을 덮고 겨울잠이다.사늘하게 고요했다.느티나무,팽나무 등 200여 그루가 우주를 향해 팔,다리를 뻗고 쉬고 있었다.어떤 나무는 허벅지에, 어떤 나무는 발등에 세월의 상처를 안고,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장수(長水)라는 지명은 금강과 섬진강의 ‘긴 물줄기’가 시작된다하여 붙여진 터. 금강(錦江)은 이성계의 조선개국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뜬봉샘’(飛鳳泉)’에서 발원한다. 장수읍을 지나는 장수천을 따라 흐르다 비단처럼 곱다는 금강 큰 물길로 들어가게 된다. 노하숲 부근에 장수천이 흐르고 있다. 숲의 아름다움에다 한결 운치를 더해주는 하천이다. 부정이 타지 않도록 맑은 물을 끊임없이 제공했다.그래서 그런지 장수사람들은 심성이 깨끗하고 맑다. 이종기(62·선창 양선마을 이장)씨는 "황희 정승 등 위폐를 모신 청계서원이 있는 양선마을에 사는데, 이 곳 노하숲은 전설과 추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며 어릴 적 술래잡기,전쟁놀이 등의 추억을 엮어냈다.

노하숲은 고려말 황희 정승(黃喜,1363년~1452년)의 아버지가 장수현감으로 있을때 만들어졌다. 당시 황희 정승의 어머니는 동헌 인근 단봉산 자락에서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렸다. 그 일대를 단봉하전(丹鳳下田), 즉 봉황이 내려오는 형국의 땅이다. 그 땅을 보호하는 숲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 지금의 노하숲이 됐다. 치성이 빚은 숲이다. ‘노하숲’이라는 이름에도 노하마을과 같이 ‘路下’라는 한자 이름이 붙어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노하마을이 ‘백로(白鷺) 즉, 해오라기가 날아와 앉아 있는 형국’이어서 노하(鷺下)라고 했다. 일제시대부터 길 밑에 있는 숲과 마을이라는 의미인 ‘路下’로 바뀌었다. 현재 노하숲의 한가운데로 왕복 4차선 국도 19호선 장수우회도로가 개통되는 바람에 정말로 길밑(路下)마을이 돼버렸다. 수백년 된 괴목,참나무,팽나무 등 우거진 숲은 지금도 무성하다.이 숲은 국난을 지킨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남원을 거쳐 장수까지 침입한 것을 의병들이 노하숲에 숨어있다가 물리쳤다고 하여 노하숲을 ‘의병숲’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노하숲은 2002년에 생명의 숲, 유한킴벌리와 산림청이 주는 ‘아름다운 마을숲’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하마을에서 굴다리를 지난 샛터보 바로 위 다리를 건너면 신기마을이다. 입구의 신기교를 지난 마을에 들어서면 폭 4-5미터 정도로 잘 포장된 도로가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봉강과 노하마을을 지나온 노하천이 논과 마을사이를 유유히 흐른다. 번성기에는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2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하정수(70·신기마을)씨는 "150여년 전 경상도에서 이사온 할아버지때 마을이 창설됐다고 한다. 쿠웨이트,사우디 등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해 돈 좀 벌었으나 서울서 사업하다 손실을 크게 봤다. 82년에 귀향해 한우,오이,고추 등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하교 위쪽 보에서 폭포수 소리가 들린다. 하얀 포말이 서로 볼을 만지며 조잘댄다.맞은 편엔 장수군 제설차량 2대가 눈을 기다리고 서있다. “계십니까,말씀 좀 묻겠습니다.”“누구세요,어이구 춥다.” 노하마을 김종석(90)씨가 길손을 맞이했다. 그는 15살때 만주에 사는 친구가 있어 그 곳에 3년간 살다가 왔다. 22살부터 25살까지는 일본으로 끌려가 북해도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어느 단체에서 얼마전 80만원을 주고 갔다. “신문사에서 나와냐,방송국에서 나와냐, 춘네 조심해 가라”며 길손을 걱정해 주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다닌다는 손자는 마땅한 놀이가 없어 심심한지 마당에서 스케이트보드를 만지작 거렸다.

다시 다리를 건너 둑길흐름에 발길을 맡겼다.장수천에는 많은 보가 설치돼 있다. 보마다 들리는 물소리가 달랐다. 쏴∼쏴∼,쑤∼쑤∼,쫠∼쫠∼.수량과 보의 구조가 다른 탓일께다. “물을 손에 쥐어본다/몸에 쉼 쉬는 물/나는 몸을 마신다/물은/당신의 몸이며/물 위에 떠있는/나의 몸이다/또는/몸 위에 떠있는/나의 물이다/물은/당신의 몸이며/나의 몸이다”-최만산 시인의 <물>이다. 투명한 장수천에 내 모습이 투영돼, 내가 물이 되고 물이 내가 된다것 같다. 햇살 받은 물비늘에 빛그림자가 춤을 춘다. 실타래를 풀듯 여울을 따라 흐름을 이어갔다. 몸과 마음을 비비고 섞어가면서.



장수천변에는 사과밭이 많다. 논에도 있다. 근데 사과밭에 대형 선풍기가 세워져 있다. 네 모퉁이에 서서 누가 빨리 회전하나 시합하는 것같다. 사과수확철 조류의 피해를 막기위해 설치된 것 같다. 겨울에 보는 사과밭 선풍기는 이색적이다. 구락마을이 어느새 옆에 따라 왔다. 들 가운데에 마을이 형성되어 정다워 보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이 유일한 산이다. 구락이라는 마을 이름에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비둘기가 떨어진 곳이라 해서 구락(鳩落)으로 불러졌다. 산서가 고향인 국헌 임옥산이란 분이 조선 초 예종때 장수현감으로 있을 때 일이다. 현감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산서까지 출퇴근하면서 정서를 보았다. 어느 날 임옥산 현감의 노친께서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현감은 백방으로 명의를 찾아 약을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하루는 스님이 와서 노심초사하는 가족들을 보고 산비둘기를 구해 다려 드리면 쾌차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그러나 비둘기를 구할 길이 없어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어느 날 현감이 정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구락마을 앞에서 난데없이 산비둘기 한 마리가 도포 자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놀란 현감은 순간 “이는 필시 하늘의 보살핌이라.”여겨 이 비둘기로 부친의 병환을 치유했다고 한다. 마을이 없던 그 곳에 비둘기가 날아들어 마을이 생겼으니 비둘기를 연상하여 구락(鳩落)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아름다운 뜻을 망가뜨리기 위해 아무 뜻도 없는 구락(九洛)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임옥산과 깊은 연관이 있는 바위가 바로 대성리 인근에 있는 관청암이다. 오산리 앞 들판에는 임옥산 효자려가 있다. 홍성준(85·구락마을)씨는 “8살때 부모님을 따라 충남논산에서 이곳으로 이사왔다. 한때 이 마을은 120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은 떠나고 40가구 밖에 안 남았다. 마을길 가운데 500년 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 명물이다. 그 나무 옆에 1천년 된 어미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죽고 지금 남은 것은 새끼 나무다.” 그는 구락마을의 산역사이자 구술가 였다.

“시간이 지났는데 점심은 먹었나”“조금 더 가다가 음식점에서 먹을까 합니다.”“우선 이거라도 먹어보게”그는 마을회관 서랍에서 건빵 한 봉지를 꺼내 주었다. 건빵 봉지엔 군용마크가 찍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넙죽 인사를 하고 길을 따랐다. 군대시절을 생각하며 건빵 하나에 별사탕 한개씩 섞어 먹었다. 하평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앞 하천은 장수천으로 흘러가 진안 용담댐으로 합류된다. 하평마을은 72년 행정조직 개편때 생겨난 이름이고 원래는 번덕마을과 용두마을이었다. 수분천과 용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용의 머리 같은 숲이 있다. 소나무숲이다.예쁜 소나무 16그루가 오손도손 겨울얘기를 나누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상봉회관 음식점이다. 주인 아들내외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야기도 나눠며 같이 먹자고 하니 “어찌 그럴수 있냐”며 극구 사양했다. 하평마을에서 한성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상모(52)씨. “제재소 운영난으로 작년보다 매출이 30%가량 줄었다. 제지회사에서 국산자재값이 오르자 수입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나무가 팔리지 않고 있다. 낙엽송의 경우 나무값이 톤당 2만원정도 올랐다. 이런 여파로 장계에서 2개소,남원에서 4개소의 제재소가 문을 닫았다.” 며 한 사장은 걱정을 많이 했다. “전에 농협창고 자리에 비석3개가 있었다. 근데 15년전부터 안보인다.어디로 옮겼는지,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그는 마을에 대해 설명하고 길손의 길을 안내해 주었다.

용계마을은 전설과 미래가 공존하는 동네다. 조선왕조의 창업을 알린 닭 울음소리가 이곳에서 비롯됐다. 고려말 왜적의 침략이 잦아 전국이 어수선 할 때, 용의 화신인 닭이 울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왜장 아지발도가 졸개들을 이끌고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며 노략질하자, 이성계 장군이 왜구정벌에 나선다. 이성계 장군 일행은 남으로 진군도중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용계마을에 이르렀고, 급한 발걸음에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다 동네 닭들의 '꼬끼꼬'하는 홰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을 깼고, 급하게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길목인 황산벌 좁은목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때서야 어둠사이로 첫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성계 장군이 잠결에 들었던 닭울음소리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도록 먼동이 트기 한참 앞서 울려퍼진 '계시'였던 셈이다. 결국 아군은 적장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왜구를 섬멸하는 대승을 거뒀다. 황산대첩을 승리로 거둔 이 장군은 귀향길에 용계마을에 들러 '용의 화신인 닭이 울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기뻐하며 마을이름을 '용계'(龍鷄)로 부르게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鷄'를 '溪'로 고쳐 부르게 하는 등 한때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마을주민들은 이같은 일화가 전설에 그치지 않고, 실제 있었던 마을의 자랑거리로 믿고 있다.

마을 입구 맞은편에 장수사과 팜스테이 농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표고버섯과 오미자도 유명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질높은 농산물은 전자상거래를 통해 전국의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 ‘http//당그래마을.com’을 운영하는 등 가상공간에서도 마을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 봄철에는 전국적인 행사로 발돋움하고 있는 사과꽃축제를 비롯해 모내기체험, 고추묘 옮겨심기, 산나물채취, 씨감자 놓기, 표고목 종균넣기 등의 체험행사를 운영한다. 여름에는 콩·옥수수·고추수확, 감자·콩 구워먹기, 옥수수 삶아먹기, 표고버섯 구워먹기, 모깃불피우기, 매미·반딧불이잡기 등이 도시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을에는 사과·감·오미자따기 및 술(차)담그기, 벼베기, 고구마·밤 구워먹기 등이 유명하고 겨울에는 김장담기, 메주·청국장만들기, 비닐포대눈썰매타기 등이 마련된다. 연중으로도 별자리를 관찰하거나 뜬봉샘의 생태답사체험, 우마차 등을 이용한 산골길 산책 등이 실시되는 등 ‘체험메카’로 알려져 있다. 강영호(79·용계마을)씨는 “용계마을은 팔공산, 뜬봉샘, 마을유래 등에서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웰빙시대를 맞아 고랭지 표고버섯과 무공해 식품인 애기시래기, 오미자, 고랭지 과채류가 전국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용계마을을 돌아 들어가면 머리테를 한 당산나무 곁에 느티나무 서너그루가 서있다. 10분쯤 가다보니 과수원에서 전지하는 주민을 봤다. “벌써부터 농사준비중인가?”의아심이 들었다. 과수 전지는 보통 싹이 돋는 봄에 많이 하는 것을 봤기때문이다. 길 모퉁이를 돌자 보리밭이다. 삭풍에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나무와 함께. “그것은 겨울 보리밭의 보리싹 같은 마음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눈이 점점 귀해지는 것 같다. 겨울 가뭄, 그것은 여름 못지않게 겨울 나무와 땅과 하늘을 메마르게 한다. 초록이 없어 삭막한 겨울을 더욱 삭막하게 한다. 눈이 쌓였다 천천히 녹으며 겨울 참나무들이 촉촉이 젖어드는 물기 어린 숲을 나는 정말 좋아하는 데, 눈이 없는 깡추위는 겨울을 무섭게 한다.” 권오분씨 에세이<꽃으로 여는세상>의 일부이다. 정말 눈 없는 깡추위는 삭막하고 무섭다. 보리는 더욱 춥다. 눈이 보리의 외투이고 이불이기에 그렇다. 보리의 생명력은 추위로 더욱 빛을 발한다. “송홧가루 날리며/고이 맺은 귀한 열매/거친 터전 위에 미래를 묻어두고

눈보라 휘몰아쳐/심장은 얼붙어도/가지마다 겹겹이/소망을 안고/인고의 밤을 지새우며/꿈을 이루어가는/겨울 소나무.

천년 세월 청청/나를 보라 하네.” 김두영 시인의 <겨울 소나무>이다. 심장이 얼어 붙을 정도의 추워는 아니지만 소나무의 초록도 겨울에 돋보이는 것인가. 코스를 임도로 갈아탔다. 길이 잘 나있었다. 경사가 심해 눈길은 미끄러웠다. 조심 조심 한발 한발 걷다보면 멋진 조망점을 만나게 된다. 장수읍내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노하숲에서 하평마을까지는 가슴과 청각으로 걸었다면, 이 코스는 맘과 눈으로 걷는 길이다. 길가 갈대와 복분자나무,사과밭이 간간히 길손과 만났다.임도에서 세번째 고갯길을 넘었다.

‘졸∼졸∼졸∼’

바위틈에서 수도꼭지를 살짝 틀어놓은 듯 물소리가 났다. 금강 발원지가 가까운 것 같다. 갈대와 억새가 서걱거렸다.여기서 부턴 콘크리트 길이다.왼쪽 계곡 밑으로 수분마을과 수분령 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푸드득∼ 푸드득∼’ 산비둘기들이 이방인인 길손에 놀라 달아났다. 눈앞에 데크계단과 뜬봉샘 안내판이 반겼다. ‘뜬봉샘 1.5㎞’ 예서부터 신무산쪽으로, 길표시가 안내했다. 신무산(897m) 아늑한 가슴팎에 뜬봉샘이 자리잡고 있었다. 뜬봉샘에서 이성계의 개국전설이 전해지고 있다.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얻기위해 계시를 받으려고 팔공산 중턱에 단을 쌓고 100일 기도에 들었갔다.100일째 되던날 새벽, 단에서 조금 떨어진 기슭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떴다. 그 무지개를 타고 봉황새가 하늘로 너울너울 날았다. 봉황이 떠가는 공중에서는 빛을 타고 아련한 무슨 소리를 들었다. 이성계가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새나라를 열라’는 천지신명의 개시가 귓전을 스쳤다.이성계는 정신을 가다듬고 무지개를 타고 봉황이 날아간 자리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풀섭으로 덮힌 옹달샘이 있었다. 이성계는 하늘의 계시를 들은 단옆에 상이함을 짓었다. 옹달샘물로 재수를 만들어 천재를 모셨다. 옹달샘에서 봉이 떴다하여 샘이름을 뜬봉샘이라 했다. 이 뜬봉샘이 금강의 발원지이다. 발원지에서 수분마을까진 한 달음 거리이다. 수분마을 이장 이명호(49)씨. 그는 “전북사람보다 충청도 사람들이 뜬봉샘을 많이 찾는다. 금강의 발원지 때문이다. 주말이면 마을길을 통해 수십명이 다녀간다.”며 “매년 음력 1월10일경에 시산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김정순(68·수분마을)씨는 수분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장수초등학교를 다니다 전학했다. “5년전 폐교된 수분초등학교가 아쉽다.공기받기,고무줄 놀이 등 많은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이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수분천주교 공소에 다닌다고 했다. 임기서(49·완주 소양)씨는 장수물공원 및 뜬봉샘 생태공원조성사업 감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뜬봉샘을 넘으면 비행기재가 나오고 함미성으로 통한다.”산행을 많이 해 길을 잘 아는 그는 인근 산세를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신무산 8부능선에 자리한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용담호와 용담댐,금강하구둑을 지나며 400㎞를 흘려 서해바로로 빠져나간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서의 한 구절처럼, 뜬봉샘의 물 한방울,한방울이 모여 천을 이루고 그 천은 바다를 이뤘다. 장쾌하고 거대한 생명줄기의 현장,뜬봉샘 가는 길은 온유(溫柔)의 질서였다. 느림과 빠름,높음과 낮음, 많고 적음….인생의 고갯길을 맛본 만만한 길이였다.

기획취재팀=이승하·하대성기자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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