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자산이다> 4>개념없는 지자체
<길이 자산이다> 4>개념없는 지자체
  • 하대성
  • 승인 2010.01.18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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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대한 지식도,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길 만들기 계획을 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상급기관에서 계획을 내라고 해서 내긴 했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공무원이 책상머리 붙잡고 고민한다고 제주올레같은 명품길이 나오겠나” “하라고 해서 하긴 하는데 어디서 뭐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전북에 개설된 걷는 길을 답사한 결과, 길 실무자들의 하소연을 들을 수 있었고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주먹구구 코스잡기

길 내기의 핵심은 노선 잡기다. 노선은 길손을 유도하는 매력 덩어리여야 한다. 거점을 잇고 공유하는 문화와 역사자원이 돼야 한다. 지역과 주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 중요한 결정이기에 시간도 제법 걸린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걷기 열풍으로 돈이 좀 된다는 소식에 너도 나도 지도 놓고 길 공부에 혈안이다.“ 이봐 A주사, 저쪽 지역은 벌써 노선을 잡고 내일 모래 개통식을 갖는다는데 자넨 뭘하고 있나. 빨리 빨리 코스 좀 잡고 보고해 봐” 길에 대한 개념 없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연구용역을 맡겨도 수천만 원에 서너 달은 족히 걸리는 작업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책상머리에서 지도 한 장 펴 놓고, 한 사람이, 그 것도 이일 저일 다 보면서 코스를 잡고 있는 실정이다. 생태탐방로 전문가 김보국 전발연 연구원은 “길의 포인트는 노선이다. 노선을 잡으면 사업의 80%는 끝난 셈이다. 헌데 일부 지역에서는 개념 없이 노선을 잡고 있다. 긴 것이 좋다고 무작정 코스를 돌리고 있고, 인도도 없는 찻길이 코스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스토리는 고사하고 문화, 역사자원도 없는 길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걷기 코스에서는 걸음을 천천히 걷듯 노선도 깊게 천천히 생각하면서 잡아야 한다.” 그는 주문했다.

무조건 걷는 길내기

어떤 지역은 역사,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어떤 지역은 자연생태가 우수한 곳이 있다. 지역마다 자산이 다르다. 차별화된 관광상품을 개발하려면 지역 자원의 그 가치를 살리는 방향으로 연구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속칭 걷기가 뜨니까 지역마다 무조건 걷는 길을 내고 있다.

자연 풍광이 좋으나 문화자원이 빈곤한 지역은 하이킹 코스나 드라이브 코스를 내야 경쟁력이 있다. 두 자원이 모두 좋으면 말할 나위도 없지만 상대적으로 월등한 자원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남이 내니 나도 내는 식으로, 내라고 하니 내는 식의 행동은 곤란하다. 지역 특성을 살린 길을 내야 길도 살고 지역주민 지갑도 두툼해 진다. 박경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은 “걷기가 유행이니까 지역마다 걷는 길만 만들면 무슨 차별성이 있느냐”며 “지역 환경과 특성을 고려한 문화 관광상품 개발이 아쉬운 실정이다.”고 말했다.

행정기관 일방 주도

길 전문가들은 ‘함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특히 지역주민들의 참여 여부가 길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강조한다. 지역주민들이나 사회단체를 참여시켜 길내기 사업을 추진한, 추진중인 도내 시군은 거의 없다. 주민 공청회나 설명회도 만무하다. 주민, 사회단체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고 행정기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속도와 효율성을 우선한 비민주적인 행태다. 행정기관에서 노선을 잡고 답사와 편의시설 설치는 자원봉사자를 활용해 속전속결로 길 개통식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같은 길 이름을 놓고 지역간 서로 우선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정휘 (사)도시환경연구센터 이사는 “길사업 구상부터 지역주민들과 함께해야 한다. 개설 후 관리, 운영도 지역주민들이 맡아 소득사업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길의 중심이 사람이듯, 길사업의 중심은 지역주민이다.”고 강조했다.

보존-수익 두 토끼

환경을 보존하는 길이 중요하다. 모두가 공존하고 공유하는, 걸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보존되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길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이고 만들어진 역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며,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의 길을 걷고 싶어한다. 인공물보다 자연미를 우선한다. 콘크리트, 데크시설은 배제해야 한다. 불가피 할 땐 별수 없지만. 편의시설, 쉼터를 만들 땐 데크시설을 만능으로 여기면 안 된다. 주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만들고 조화롭게 꾸며야 한다. 서명숙 (주)제주올레 이사장은 “길 사업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길을 내는 것이고 길을 잇는 것이다.”며 “개발적 개념으로 포그레인 동원하고 콘크리트 붓는 식으로 접근하면 길을 망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제주올레 처럼 길만 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며 섬지역 올레길 모델을 내륙 길사업에 적용 자체가 무리다.”고 덧붙였다.

전문가·지침 전무

걷기열풍에 비해 길 전문가와 공무원도 없는 상태다. 트레일 법도 없다. 보행로 폭은 얼마로 해야 하고, 어떤 형태가 좋은가 등 길 관련법이 없어 지역마다 ‘생각대로’ 길을 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찾을 수 있는 임도를 옛길이라고 선보이고 있다. 난간이나 벼랑에 필요없는 굵은 로프가 연결된 목책을 세우기도 한다. 어쩌다 작은 표지 목 하나 세워 길을 안내해도 아무 불편이 없을 것을 데크로 휘감는 공사를 진행해 국고를 손실되는 경우도 있었다. 신정일 우리땅 걷기 이사장(본보 로드다큐<길>자문위원장)은 “길사업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트레일 법이다.”며 “길을 제대로 내려면 길 관련 지침과 법규 제정이 조속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길 해설사·강 해설사 등 전문가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 개설도 서둘려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자생풍수>를 저술한 최창조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풍수에서 도로는 물길을 대신한다. 물이 없는 경우, 같은 흐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일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길의 풍수적 의미는 물의 풍수적 의미와 동일하다. 그것은 음양의 조화, 강유의 보완, 완급의 상보를 있게 하는 원천이다. 길이 시원치 않다는 것은 물이 부족한 경우와 마찬가지다. 사람을 궁색하고 편협하게 한다.” 요즘 자치단체에서 내는 길 사정은 어떠한가. 전반적으로 조화와 보완, 상보가 잘 돼있는가. 사람들을 궁색하고 편협하며 조급하게 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곰곰이 천천히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하대성 기자@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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