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곰티 옛길
(8) 곰티 옛길
  • 하대성
  • 승인 2009.12.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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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웃고 넘나들던 천년의 길
"왜군이다. 수만 명이 밀려온다." 적천골에서 척후가 급한 전갈을 알렸다. “제장들은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를 임하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왜군들이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소정골에 진입했다. 관군과 의병들은 맞서 싸웠다. 많은 왜군을 사살했다. 1592년 7월7일 임진왜란 웅치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다음날 새벽. 왜군이 전면 공세를 펼쳤다. 온 골짝을 메웠다. 총성은 우레 같고 칼날은 번개같았다. 곰티재를 향해 기어 올라왔다. 전후좌우에서 세력을 보강하며 조선군을 밀어붙였다. 웅치골 마을 입구를 맡은 제1선인 의병장 황박부대가 제2선인 나주판관 이복남 진지로 밀렸다. 김제군수 정담은 제3선에서 활에 살을 메겼다. 붉은 깃대 밑에서 백마를 타고 오는 왜군 장수를 겨눴다. 그리고 힘껏 당겼다. 목을 향해 쐈다. 왜군장수가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왜군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부장 한 사람이 정담에게 다가와서 왔다. “장군, 후퇴해야 합니다. 왜군이 너무 많아 이러다간 아군이 전멸한 것 같습니다.” 정담은 부장의 후퇴권유를 뿌리쳤다.“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발도 물러설 수 없다.” 정담은 계속 활을 당겼다. 해가 저물 무렵까지 전투는 계속됐다. 조선군과 왜군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때 조선 군대 가운데에서 “화살이 다 떨어졌다.”고 외치며 도망하는 자가 발생했다. 왜군은 다시 겹겹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정담과 장병들은 최후까지 활을 쏘고 백병전을 벌였다. 골짝에 선혈이 낭자했다. 피가 내를 이뤘다. 정담은 순절했다. 사천인 의병 김수,김정 형제와 함께. 조선군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유해를 모아 길 가에 묻었다. 조선국의 충신과 의사의 넋을 조문한다는 푯말을 세웠다. 9일 웅치를 가까스로 넘은 왜군들은 전주성을 엿보았으나 수비가 튼튼했다. 곰치전투에서 주력을 상실해 왜군들은 마침내 전주 공략을 포기했다. 임진왜란 당시 곰티전투의 상황을 <선조실록>과 조경남의 <난중갑록>을 토대로 풀어본 것이다.

웅치는 곰티재의 한문표기다. 섬진강의 최상류로서 남녘의 명산 지리의 맥을 모악과 운장으로 이어준다. 호남의 지붕이라 불리는 진안고원의 서쪽 끝이다. 백제시대 이전부터 넘나든 천여년길, 곰티 옛길은 진안 부귀면 세동리에서 완주군 소양면으로 연결된다. 노령 산줄기를 가로질려 전주로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산간 고지대인 진안에서 평야부인 완주로 가는 지름길이다. 구비 구비 산중턱을 타고 오가는 길이다. 이 길은 일제시대 만든 곰티재 신작로를 내기 전의 ‘원님길’이다. 원님이 진안과 전주를 행차하며 이용했다. 조선시대 고속도로인 셈이다. 신기마을과 덕봉마을은 1800년경에 밀양 손씨에 의해서 이뤄졌다. 손씨가 마을 전체의 70%다. 손씨 집성촌이다. 마을행정명은 신덕(신기+덕봉)이다. 신기마을 길을 따라 덕봉마을 뒷산 계곡으로 들어서면 외딴집이 나온다. 집주인 손종엽(48)씨는 “예전에는 재를 넘기 전에 길손이 쉬어가는 주막이 계곡 어귀에 있었다. 초입 오른쪽 산엔 지금도 돌무더기가 산재해 있다. 성처럼 쌓여 있다.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 사업 때 주민들이 가져다가 도로포장, 담쌓기에 많이 가져다 썼다.”고 말했다. 오른쪽 산기슭엔 벌통 수백 개가 웅크리고 있다. 마치 왜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앞 오른쪽에 숨겨놓은 듯한 공간이 있다. 콘크리트로 잘 포장돼 있다. 진치골이다. 조선군과 의병들이 왜군을 막으려고 이곳에 진을 친 골짜기라는 뜻이다. 지금은 염소우리로 쓰고 있다. 현재 이 일대는 웅치전으로 인하여 붙여진 지명이 많이 구전되고 있다. 왜군의 동정을 살폈다는 여사골, 최초의 승리를 왕에게 고했다는 승고곡, 적의 동정을 살폈다는 관망대, 집힌골, 대피골등이 그것이다. 외딴집 입구 왼쪽 길은 손씨가 만든 임도다. 집마당을 통해 정자가 보이는 산길이 웅치옛길이다. 원님길이다. 길 윤곽이 확연하다. 길가에는 표고버섯 재배용 느티나무가 비닐을 덮고 겨울잠이다. 손씨는 이 길로 다니기 편하게 약간 넓혔다고 한다. 200여m 가면 우측에 진지처럼 보이는, 무덤처럼 보이는 것이 나온다. 인위적으로 만든 모습이다. 길가에 돌멩이들이 많다. 고개까지 거리는 200여m. 참나무 낙엽이 수북하다. 발목까지 빠진다. 침대처럼 푹신하다. 꼭대기에는 지름 20여 미터,높이 7-8미터 쯤되는 돌무더기(성황터)가 나온다. 옛날이 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은 돌멩이 하나씩 던지며 여러 소원을 빌었다. 할아버지·할머니·부모님의 장수를, 아들·딸 혼사가 잘 되기를. 옆에는 웅치전적지 안내문이 서있다. “이 재는 예전 신작로가 나기 전 진안-전주간의 주요 교통로였다.<중략>이 재 부근과 연결되는 능선 곳곳에서는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합장한듯한 돌무덤이 산재한다.”2001년 12월 진안문화원에서 세운 것이다. 손석진(79·대곡마을)씨는 “이 곳은 어른들이 들려주었던 전설이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설이 아닌 사실(史實)이 더 많은 것 같다. 원터,성터,무덤 추정지역 등을 발굴조사를 해보면 많은 유물이 나올 것 같다. 원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몇편은 진안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며 제대로 된 조사를 바탕으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山頂은/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조정권‘산정묘지1’중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함성은 역사 속에 얼어붙었다. 계곡과 계곡사이에서,바위와 바위사이에서. 417년간의 침묵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정신이다. 바람마저 차갑다.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무덤으로 보이는 1-2m높이의 봉분 3기가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이곳을 천인의총(千人義塚)으로 보고 있다. 1992년 전북문화재전문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했던 황안웅 원광대 동양학대학원교수는 “왜군이 무덤을 만들고 조선군을 조문했다는 얘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든 바가 있다. 왜장 안국사 혜경(安國寺 惠瓊)이 승려출신인 까닭도 있겠으나 싸우는 마당에서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또 오죽 격전이었으면 그랬으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왜장바위다. 김제군수 정담의 화살 한방에 왜장 간담이 날아간 곳이다. 네댓 개 돌덩이가 바위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 바위 사이로 길은 흐른다. 그날의 혈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나무와 참나무는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을 흔들어 댔다. 쌓인 낙엽에 눈 덮인 능선은 미끄러웠다. 헛발 디디면 계곡으로 쭉 눈썰매 탈것 같았다. 고개에서 약 1,5㎞ 떨어진 소양 신촌마을에 다 왔다. 고개에서 마을까지 보통은 20여 분 거리다. 이날은 50분 걸렸다. 눈과 초행, 감상과 촬영으로 시간을 곱절로 잡아먹었다.

모래재를 다시 넘어 적내마을에 도착했다. 적내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침공한 곳이라 해서 賊來(적래)로 불렸다. 이후 적내의 적을 음으로 취하여 피리를 뜻하는 笛(적)으로 고치고, 내는 한자의 뜻을 취하여 川(천)으로 하여 笛川(적천)이라 불렀다. 진미가든을 통하여 콘크리트길을 따라가다 오른쪽 첫 번째 집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왼쪽 집을 통과하면 오른쪽에 비닐하우스 옆이 적내재 초입이다. 골짝으로 500여 미터 들어가면 완만하게 쩍 벌어진 계곡이다. 돔구장 관중석 같다. 깡충깡충 뛰는 아이들 손잡고 걸을 수 있다. 넓고 안전하다. 길을 가로질러 자빠져 있는 고목 2개만 치우면 축구 경기를 해도 될성싶다. 고개까진 부담없는 길이다. 고개에서 왼쪽을 보면 신보광석 표지석이 눈 속에 앉아있다. ‘1989년 신보89-3호 200미터 대한광업진흥공사’ 글씨가 선명하게 콘크리트 구조물에 쓰여있다. 내리막길이 가파르다. 저 멀리 솔정마을 길이 보인다. 적천마을 사람들은 이 길로 소를 팔려고 가다 깔끄막 바위에서 소가 많이 다쳤다고 한다. 두발 사람들도 가기 힘든데, 네발 소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곳을 거쳐 좀더 내려가면 석성처럼 쌓은 석축이 나온다. 아마도 그 위에 집을 짓지않았나 싶다. 그 다음 길부턴 잡목이 발을 잡았다. 넝쿨이 어깨를 걸었다. 가시나무가 목을 감고 놓아 주길 않았다. 길은 바로 저긴데, 이동할 수가 없었다. 낮은 포복, 어깨치기,후진,대회전 등 통과기술을 총동원하여 20여분 거리를 1시간 걸려 삼중마을에 도착했다. 적내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지금은 폐광된 신보광산이다. 신보광산에서 1960년5월1일부터 일했다는 정봉래(74·신원마을)씨.“신보광산 활석은 일본에서도 알아줬다. 쓰임새가 많아 인기가 좋았다. 당시 전남출신 박의풍사장은 돈을 많이 벌었다. 노임은 하루도 밀릴 것이 없었다. 하루 일당은 70원으로 보리 되반의 값이었다. 그땐 일거리가 없어 신보광산에서 1천300여명이 일했다.”며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적내재는 곰티재에 비하여 약 1㎞가 빠르다. 완주군 쪽으로 비탈이 곰티재에 비하여 3배 넘게 급하여 짐을 무거운 사람은 오르기가 불편하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길 곳곳이 훼손됐지만 흔적은 선명했다. 잡목과 넝쿨을 제거하고 이어주면 명품길이 될 것 같다.

소양에서 모래재를 넘어 신정호를 곁에 두고 웅치전적비가 있는 곰재로 왔다. 부귀 부암마을 뒤편에서 웅치전적비 밑으로 난 마루턱 바위에 ‘도로표지석’이 있다. 너비 50㎝에 높이 1m의 월석으로 정면에는 비문이 마모돼 문자가 안 보인다. 도로위험표시만 크게 새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후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용엽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이 표석은 조선말 1740년 이후(임진왜란 이후 200년)에 새로 곰티재 도로를 개설하고 공사에 참여한 관리들의 공적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제시대(1930년대)에 곰티재에 신작로를 개설 한 뒤 차량 안전운행을 위해 도로에서 눈에 띄는 이 표석에 도로 위험표시를 새기면서 비문을 쪼아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이 표석 밑으로 조선시대 옛길이 선명하게 나있다. 그냥 오솔길이 아니다. 수레가 다닐 정도의 넓었다.”며 낫으로 넝쿨을 자르며 길을 안내했다. 낙엽이 쌓여있지만 길의 흔적은 뚜렷했다. 곳곳에 섞어 넘어진 나무가 엎어져 있었다. 중간에선 토끼 바위(토끼 형상으로 정확한 이름은 모름)가 반겼다. 진지도 나타났다. 전쟁용인지 훈련용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산죽이 보조를 서고 있었다. 중간쯤 내려오자 길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사태로 계곡에 잡목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졸졸졸∼’엄동설한, 아무도 없는 이 산속에서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바위들이 수정 고드름도 입에 물고서. 정적속 자연이 부르는 교향시다. 바람과 새와 물의 합작이다. 여기저기 가시로 찔리고 몇 차례 엉덩방아도 찧었지만 그 자연소리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멀리서도 보이는 월상마을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훼손된 길이 많아 그만큼 헤맸다. 바로 옆에 길이 있었는데 못 찾은 경우도 있었다. 소류지 옆에 묘지 군락. 사자(死者)들의 아파트다. 개 축사를 지나면 오른쪽 논길을 거쳐 대나무길이다. 빠져나오면 월상마을 표지석이 버티고 있다.

‘겨울 길은 /좁은 길이라도/끝없이 이어지길 원하며/그 길을 정처 없이 걸어가련다./꽃이 없어/풀이 없어/넓은 듯 다가서는/그 길을 꾸밈없이 따라 가면/벌이 없어도 /나비가 없어도/바람이 기꺼이 손잡아 주마/다가 올 테고 /나목이/홀가분하게 서서/쓸쓸함 달래주마/반길 테니 /나풀나풀/하얀 눈 내려와/비고 빈 마음 채워주마/소복소복 쌓여 들 테니/길이 끝나는 /그 눈밭에서 발자국 꾹꾹 눌러/당신의 이름 새겨두고/당신 닮은 눈사람 만들며/나, 홀로 당신을 기다려 보련다./겨울이 끝나는 그날까지’ <권정순의 겨울 길> 옛날 월상사람들은 고개(목) 빠지게 고개(재)를 바라봤다. 이제나 오는 저 제나 오나, 눈 빠지게 기다렸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장에 간 남편을, 시집간 지 3년 만에 친정 오는 딸을, 과거보고 부픈 가슴 안고 오는 아들을……. 곰티재에서 만난 장록진(56·부귀농협)씨는 “곰티재는 넘을 때마다 새롭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봄이면 봄대로 상큼이 풍기고 여름이면 시원함이 넘친다. 가을과 겨울은 나름대로 운치가 더한다. 옛길을 잘 정비해 놓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옛날 얘기하면서 걷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진안에 마실 나왔다는 강순자(53·전주 효자동)씨는 “웅치전적지에 처음 와 봤다. 전주가 한눈에 보이고 바람도 시원해 좋다. 곰티재 신작로를 타고 내려갈 예정이다. 조심해서 옛길을 찾기 바란다”며 길손을 염려해 주었다. 높든 낮든 이야깃거리가 많은 게 고개다. 고개가 하도 험해서 60명이 모여야 넘었다는 장수 육십령, 인천 천명이 고개는 도둑이 들끓어 천 명이 모야 넘었다고 한다. 또한 부여군 홍산면 홍량리 한희동에는 고개가 높고 험할 뿐만 아니라 도둑이 많아서 만 명이 모여야 넘었다는 만인재 고개가 있다. 곰티재는 예나 지금이나 도둑은 없어 혼자 넘어도 되는 길이다.

<진안-완주 옛길 4개>

▲조약재- 진안 부귀면 봉암리 죄약골에서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송정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고개가 가파르고 경사가 심하여 마치 새걸음 걷듯 총총걸음으로 걸어야 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적천재- 진안 부귀면 적천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삼중마을로 넘어가는 코스다. 고개가 가파르나 거리가 짧지않아 빈 몸으로 갈 때 주로 이 길을 택하여 전주를 왕래했다.

▲옛 곰티재- 부귀 세동 덕봉마을에서 완주군 소양면 두목리 신촌야영장으로 넘어가는 재다. 좀 멀기는 해도 고개가 평단하여 짐을 지거나 가마나 밀을 타고 넘을 때 이 길을 넘었다. 주로 원님들이 왕래하던 길로 전해진다. 이 길은 일제시대 개설된 신작로 이전의 공로(公路)로 보인다.

▲새 곰티재-진안 부귀 세동리 부암에서 완주 소양 신촌리 월상마을로 넘어가는 길이다. 조선후기에 새로 생긴 고갯길로 여겨진다. 웅치골에서 임진왜란때 많은 사람들이 전사한 이후, 이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기획취재팀=하대성·추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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